장녀와 차녀 사이 미묘한 기류···아모레퍼시픽 승계 구도 변화 ‘신호’
차녀 서호정, 오설록 입사로 존재감 강화 장녀 서민정 휴직 속 지분 격차 좁혀져 화장품 vs 비(非)화장품 구조 승계방안도
아모레퍼시픽의 승계 구도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의 차녀인 서호정 씨가 그룹 계열사 오설록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면서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모양새다. 앞서 본사에서 경영수업을 받던 장녀 서민정 씨가 장기휴직에 들어간 사이, 그룹 내 공식 경력이 없던 차녀가 몇 년 사이 지분을 꾸준히 늘려나간 데 이어 본격적인 경영 수업에 들어가면서 자매간 후계 시나리오의 향방에 이목이 집중된다.
7일 화장품 업계에 따르면 서경배 회장의 차녀인 1995년생 서호정 씨는 지난 1일부로 아모레퍼시픽그룹의 100% 자회사인 오설록 상품개발(PD)팀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2018년에 미국 코넬대학교 호텔경영학과를 졸업한 서 씨는 제품 개발과 마케팅을 담당하며 업무 경험을 쌓아 나갈 예정이다.
서 씨가 경영수업을 시작한 오설록은 그룹 내 미래 먹거리로 주목받는 사업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오설록은 아모레퍼시픽 창업주 고(故) 서성환 선대회장부터 시작해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제주도 한라산 남서쪽 도순 지역의 황무지를 녹차밭으로 개간하며 녹차를 우리나라 고유의 차로 키워내기 위한 서 선대회장의 의지로 브랜드가 만들어졌다. 2019년 아모레퍼시픽 내 사업부였던 오설록은 분사해 독립 법인으로 출범했다. 출범 첫 해 영업손실 2억8000만원을 기록했지만 지난해 매출 900억원을 돌파했다. 영업이익은 92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특히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약 69% 증가하며 그룹 계열사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일각에선 승계 유력 후보로 꼽히던 장녀 서민정 씨의 업무 복귀가 불투명한 상태로 차녀에 경영 승계가 쏠리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나온다. 1991년생으로 동생과 같은 대학인 미국 코넬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서민정 씨는 2017년 1월 베인앤드컴퍼니를 거쳐 아모레퍼시픽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약 6개월간 근무 후 퇴사하고, 중국 장강상학원(CKGSB)에서 MBA 과정을 수료했다. 2019년 아모레퍼시픽에 과장급으로 재입사해 뷰티영업전략팀과 럭셔리 브랜드 마케팅 부서에서 근무하고 전무로 초고속 승진하는 등 그룹 내 존재감을 키워나갔다. 그러다가 2020년 홍석준 보광창업투자 회장의 장남과 결혼 이후 7개월 만에 이혼했고, 2023년부터는 장기 휴직 중이다. 현재까지 공식적인 업무 복귀는 없는 상태다.
현재 자매의 지분 격차는 미미하다. 서민정 씨의 지분은 약 2.66%로, 보통주 2.93%와 우선주 1.04% 지분을 보유 중이다. 서호정 씨는 2021년 서경배 회장으로부터 보통주 67만2000주 (약 0.97%), 전환우선주 172만8000주 (약 12.77%)를 증여 받은 이후 우선주를 포함 약 2.5% 이상의 지분을 확보했으며, 일부 매도 후에도 2.55%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보통주 지분율은 서민정 씨가 더 높지만, 서호정 씨가 보유한 12.77%의 우선주 존재감이 커지면서 경영 승계 구도가 예전만큼 명확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용히 존재감을 키우는 서호정 씨의 행보가 지분 구조 변화의 신호란 해석도 있다.
우선주는 일반적으로 의결권이 없지만, 전환 우선주의 경우 정해진 조건에 따라 보통주로 바꿀 수 있어 향후 지분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 특히 아모레퍼시픽처럼 오너 일가의 지분율이 박빙인 상황에선 지금은 의결권이 없어도 나중에 보통주로 전환하면 경영권 확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서호정 씨가 가진 12.77%의 우선주는 현재보다 미래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해 서경배 회장은 국내 상속세율이 최대 65%에 달하는 상황에서 생전 증여로 세금 부담을 분산하고, 향후 승계 구도를 유연하게 조율하기 위한 포석을 마련해놓은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서호정 씨는 증여받은 지분 중 일부를 매각해 증여세를 납부했으며, 두 딸의 지분율을 2%대 중반으로 비슷하게 유지하는 것도 이 같은 전략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차녀 서호정 씨를 후계 구도의 중심으로 보기에는 이르다는 신중론도 있다. 아직까진 두 딸의 나이가 젊고, 서경배 회장도 1963년생으로 은퇴를 논의하긴 이른 만큼, 향후 오설록, 아모레퍼시픽의 경영 성과나 그룹 재편에 따라 승계 적임자를 확정하기 전까지 지분을 유사하게 관리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또한 아모레퍼시픽의 주력 사업이 화장품인 점을 고려할 때, 비(非)화장품 계열사인 오설록에 차녀 서호정 씨를 입사시킨 것을 두고 장녀 서민정 씨의 입지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화장품은 서민정 씨, 비 화장품은 서호정 씨로 사업을 양분해 승계하려는 게 아니냐는 예측도 제기된다.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여성경제신문에 “현재로서는 승계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며 “이제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만큼 현재 경영 등을 맡아서 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기에 확정된 바가 없다”고 말했다.
여성경제신문 류빈 기자 rba@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