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시에나의 숨멎 순간들과 염소의 눈빛
[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어쩌다 한 달, 이탈리아 (16) 신의 붓으로 그린 색채와 소리 닭은 홰를 치고, 우리는 빵을 굽고
시에나는 참 좋았다. 그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표본’을 박제해 놓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화폭 속에 들어앉은 듯한 풍경과 빼곡한 유적에 켜켜이 스민 역사와 이야기까지. 다만 인파를 피해 들어간 식당만은 예외였다.
시에나는 나만 좋아하는 곳이 아니라 정말 사람이 많았다. 골목골목 사람이 미어터져 인기 맛집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눈에 띄는 한산한 식당에 무심히 들어갔다. 이탈리아 여행 기간을 통틀어 유일하게, 그리고 아주 확실하게, 맛없는 음식을 먹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자레인지로 데운 쓰레기’ 수준의 음식이라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최고로 멋진 풍경 속에서 만난 최악의 음식, 이탈리아에서도 맛없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나름의 부조리 체험이다.
대성당은 압도적이다. 시에나 도시의 모든 골목을 샅샅이 뒤지듯 다니느라 피로가 몰려왔지만 피곤하다는 감각을 사라지게 할 만큼의 경이. 무엇보다 날 숨 멎게 만든 건 피콜로미니 도서관이다.
인간의 손이 아니라 ‘기도하는 붓’으로 남긴 색채와 그림들, 그리고 성가 책에서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아름다운 노래와 기도를 살아 숨 쉬는 색과 선, 그림으로 장식한 성물에 가까운 책들이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봤던 <켈트의 서>도 기억이 떠올랐고, 이스탄불의 슐레이마니예 도서관에서 본 쿠란 장정본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신에게 바치는 노래, 기도와 말씀들을 책이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들의 최선과 최고를 갈아 넣는다. 공통으로 믿을 수 없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또한 거대하고 무겁다. 무릎에 올려놓을 수는 없는 것들이다. 바로 멍이 들고 마비가 올 테니까.
시에나의 수도시설이자 분수 폰테 브란다를 지나 카타리나 성녀의 집을 돌아보고, 시에나의 모든 골목길을 작정하고 샅샅이 걸었다. 이 정도면 여행이 아니라 ‘자발적 피로 누적 실험’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길을 잃어도 좋은 도시니까 일행들과 일부러 떨어져 각자 자유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취향을 따라 도시를 골라 돌아보고 나는 끝으로 시에나 대학가에 도착했다. 누군가 서명을 해달라고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팔레스타인에 대한 살상을 규탄하는 모임이다.
‘팔레스타인에 자유를’이라고 쓰인 플래카드 아래 반이스라엘 구호가 적힌 피켓들, 확성기를 통해 나직하지만 절박한 목소리들이 모여있는 집회 한복판에서 나는 한참 서 있었다.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너무나 복잡하고 오래된 힘과 폭력의 도돌이표다.
누가 약자인가, 폭력과 응징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역시 정답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그날 시에나의 학생들은 하루하루 삶의 터전을 잃고 피난민이 되어가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좋았고 시에나의 석조 아치 사이로 울려 퍼지는 그들의 외침은 묘하게 중세적이었다. 힘보다 연민을 앞세워 신념을 외치는 풍경이랄까.
도시의 감동과 거리의 고민을 한 몸에 안고 캠핑장으로 향했다. 내 다리는 내 다리가 아니었고, 눈꺼풀은 지붕처럼 무거웠고 기절할 만큼 피곤한 날이었지만 마음은 기이하게 평온했다. 게다가 그날의 캠핑장은 또 다른 세계, 말 그대로 진짜 올가닉이다.
텐트 옆 울타리 하나 사이로 염소가 느릿느릿 내 얼굴을 쳐다보며 거닐었고, 때때로 닭은 울타리를 넘어와 우리 자리를 휘저었다. 급히 오느라 가게에 들르지 못해 식재료가 없다고 하니 캠핑장이 속한 농장에서 키우는 닭이 그날 낳은 계란을 판매한다고 했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모두 섞은 말로 주인아주머니가 밖으로 소리를 지르자마자 주인집 아이는 닭 우리로 뛰어갔다. 조금 후에 우리가 주문한 숫자만큼 달걀을 쥐고 왔다. 아직 따듯한 것들이었다. 플라스틱이나 종이 트레이의 마트 달걀이 아니라 뒷마당에서 생명의 온기가 담긴 계란을 받았다. 자연이 바로 주방이다.
주인 여인과 구글 번역기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눴다.
“당신, 한국에서 왔어요? 여기까지 텐트 들고 온 거예요?”
화면에 뜬 글자들을 따라 읽고 대답을 타이핑했다. “걷는 걸 좋아해요. 아주 많이."
그녀는 번역기 화면에 엄지손가락을 올리고, 다시 쿡쿡 눌러 몇 자를 입력한다.
“부럽네요. 난 여행할 수가 없어요." "처음에는 채소만 키웠어요. 조용하고 좋았죠. 그런데 남편이 닭을 들이자고 했고, 그다음엔 염소, 그다음엔 캠핑장까지. 너무 할 일이 많아요. 게다가 지금 남편이 어딨는 줄 아세요? 염소보다 느려요. 나 혼자 다 해요!”
주고받는 문장들은 번역기 너머에 있어도 목소리가 들린 것처럼 생생하다. 어떻게 세상의 아줌마들은 만나자마자 남편을 디스하며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일까? 그녀는 고단하다고 불평하듯 말했지만,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그래도 자연에서 사는 게 좋잖아요. 나도 부러워요.”
“그렇죠. 힘들지만 자유롭고 여기선 모두 내 마음대로죠. 내가 여왕이에요. 이 일대가 다 내 땅이에요. 닭, 염소, 당나귀, 토끼 모두 다 우리 거구요.”
하루하루를 맛있게 오물오물 씹어 먹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지는 자부심과 낙천성이다. 그녀는 자기 빵을 한 번 먹고 나면 잊을 수 없을 거라며 놀라운 수완으로 아침 빵 주문을 유도했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에 먹을 빵을 부탁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 개? 알겠어요. 잊을 수 없이 맛있는 빵을 먹게 해 줄게요.”
캠핑장에는 어린 캠핑객도 있었다. 우리는 염소를 사이에 두고 함께 있었다. 아이는 무릎을 꿇고 염소를 바라보더니 그 옆에서 염소의 뿔과 등을 슬쩍 만졌다. 아이가 나를 보며 무어라 말하며 웃는다.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완벽한 대화다. 번역할 수 없는 대화였지만 충분했다. 동물과 인간, 인간 사이에서 흘러나온 미소 같은 순간에 언어가 꼭 필요할까? 공감에는 염소 한 마리면 충분하다.
다음 날 아침 텐트 옆에서 닭은 홰를 치며 요란하게 존재감을 증명했다. 닭 소리를 듣고 깨서 텐트를 열어 아침 이슬로 촉촉한 공기를 마셨다. 텐트 앞으로 따끈따끈한 빵 두 개가 배달되었고 모닝커피와 함께 햇살을 올려 빵을 먹었다. 조금은 자연과 가까워진 기분이다. 아니, 조금은 염소스럽고 닭스러워졌다.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