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주 더봄] 안경은 ‘보는’ 도구이자 ‘보여지는’ 장치
[권혁주의 Good Buy] 안경을 사는 이유? 안경에 담긴 이중적인 욕망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며칠 전 행사 진행 차 한 포럼에 참석했다. 단상 위 아홉 명의 프레젠터 분들, 그중 일곱 명이 안경을 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안경 스타일이 다양하시네.’
아마도 부족한 시력을 보완하기 위해 착용한 안경일 테지만, 누구는 뿔테를, 누구는 금테를, 누구는 라운드테를, 누구는 사각테를 쓴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안경은 ‘보는 물건’이지만, ‘보여지는 물건’이 아닐까.
얼마 전 남대문시장에서 안경을 샀다. 남대문시장을 걷다가 우연히 오래된 안경원을 발견했다. 문 앞에 ‘즉석 안경 1시간 완성’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구경차 매장에 들어섰다. 진열장엔 각양각색의 안경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금색의 얇은 -마치 깐깐한 수학자가 떠오르는-사각 안경테였다. “이거 보여주세요.”
안경사가 웃으며 말했다. “이거 티타늄이에요. 가볍고 튼튼해요.” 써보니 과연 그랬다. “이걸로 할게요.” 안경사는 “렌즈는 UV 차단 되는 걸로 해서 넣어드릴게요. 40분 후에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라섹 수술 전까지는 안경을 구매할 때 렌즈 도수를 가장 신경 썼는데, 이제는 안경테만 고려하면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이 안경을 쓴다. 대개는 시력을 보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 렌즈를 끼고도 일부러 안경을 쓰는 이들이 있다. 일명 ‘패션 안경.’ 눈이 나쁘지 않아도 코 받침 위에 프레임을 얹는 이유는 간단하다. 안경 하나로 ‘이미지’가 바뀌기 때문이다. 지적으로 보이고, 차분해 보이고, 때론 개성 있어 보인다. 심지어 ‘믿음직해 보이는 얼굴’을 위해 안경을 고른다는 사람도 있다.
이쯤 되면 안경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얼굴 위의 상징이 된다. 실용성과 꾸밈의 경계를 오가는 물건. 시력을 보정하는 동시에 나를 표현하는 장치. 그러니 어쩌면 안경이란 ‘실용의 탈을 쓴 허영’이거나, ‘허영을 품은 실용’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모호한 경계가 시장에서 가격 혼란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안경을 고를 때 품질보다 브랜드, 기능보다 이미지에 끌린다. 결국 실용은 자리를 내주고 허영이 가격을 정한다. 작은 프레임에 붙는 20만원, 30만원짜리 가격표는 ‘원가’보다 ‘이미지’의 값이다.
허영이 나쁘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를 꾸미고 싶어 한다. 단지, 그 꾸밈이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안경 하나에도 ‘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가 교차한다. 실용과 패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다움’을 찾는다.
거울에 비친 안경을 쓴 내 모습을 본다. 안경을 쓰건 안 쓰건 렌즈 너머로 보이는 세상의 해상도는 같지만, 안경을 쓴 모습과 쓰지 않은 내 얼굴은 다르다. 어쩌면 안경은 이제 나에게는 명함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똑 부러진 느낌을 내고 싶을 때 쓰는 페르소나 같은.
남대문에서 산 이 사각 프레임의 금테 안경이 꼭 정답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균형 잡힌 선택이었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서 말이다.
여성경제신문 권혁주 쇼호스트 kwonhj100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