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웅익 더봄] 용마폭포공원을 마주한 날
[손웅익의 건축마실] 강산이 몇 번 변하는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 남아있는 기억
경주시 외곽 산골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진학하던 해 서울로 이사 왔다. 그해가 1967년이었다. 서울에 오기 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 살았다. 밤에 청량리역에 내려서 호롱불이 하늘에 좍 달려있는 것을 올려다보면서 참 신기했었다. 가로등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처음엔 제기동에 살았는데, 그 시절 오래된 기와집이 많았다. 며칠 후에 어머니께서 싸 주신 도시락을 하나 들고 서울 구경에 나섰다. 청량리에서 동대문과 종로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제기동에서 신설동을 거쳐 동대문을 지나서 종로통을 걸었다.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고 서대문 사거리 방면으로 가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시청 근처 아주 높은 빌딩에 매료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 빌딩 로비에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벽에 있는 문이 열리고 사람 몇 명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문이 다시 열리는데 조금 전에 그 안에서 들어간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었다. 너무도 놀라서 계속 지켜봤다. 여자가 들어갔는데 남자로 변신이 되어 나오기도 하고, 분명히 한 명이 들어갔는데 잠시 후에 여러 명으로 바뀌어 나오기도 했다.
그 작은 방은 괴이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들어가 볼까 말까 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어른들을 따라 들어가게 되었다. 작은 방이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덜컹하면서 서버렸다. 어른들이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내 몸도 변신이 되는가 하면서 오랜 시간 그 방에서 덜덜 떨면서 기다렸다.
어느 순간 소방관들이 밖에서 문을 열었는데 층과 층 사이에 그 방이 멈추어 있었다. 소방관들은 나를 제일 먼저 꺼내 주었다. 그날의 사건은 시골 촌뜨기가 처음 경험한 엘리베이터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되었다.
어둑어둑한 저녁이 다 되어서야 제기동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제는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든 집이 비슷비슷하게 생겼고 골목은 거기가 거기 같았다. 그러다가 큰길로 나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또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길가에 아주 높은 계단이 있었는데 그 계단을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것이었다. 쳐다보니 그 꼭대기는 하늘이었다. 거기도 올라가 보고 싶었는데 당장 우리 집을 찾아야 해서 포기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육교였다.
제기동에서 1년 살고 면목동 아차산 기슭으로 이사했다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지금의 용마폭포공원 근처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해가 1969년이었다. 지금의 용마폭포공원은 그 시절 돌을 캐는 석산이었다. 돌을 캐는 석산 아래 산비탈엔 판잣집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어른들은 밤마다 횃불을 밝히고 집을 지었다. 무허가 집이라 야밤에 공사를 했던 것 같다. 우리 집도 블럭으로 벽을 대충 쌓고 벽 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루핑이라는 검은 기름종이를 덮은 무허가 집이었다. 바위를 깨느라 수시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렸다. 석산 바로 옆에 있는 우리 동네로 돌 파편이 날아왔고 가끔은 지붕을 뚫고 방으로 돌 파편이 날아들었다. 그렇게 지붕은 구멍이 숭숭 뚫려서 비가 오면 방안이 온통 물바다가 되곤 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가 그 동네로 이사하던 1960년대 후반은 서울에 서민 아파트를 여기저기 건설하던 시기였다. 1969년 창의문 건너편 산비탈에 있던 판자촌을 철거하고 청운아파트가 지어졌다. 지금의 윤동주문학관은 그 청운아파트에 식수를 공급하던 물탱크와 펌프실을 개조한 것이다.
1970년 4월에는 홍대 뒷산 와우산에 세워진 와우아파트가 입주하자마자 무너져 내려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요즘은 산 위에 지은 아파트가 전망이 좋아 인기가 많지만 그 시절엔 높은 지대의 식수 사정도 좋지 않고 자가용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산꼭대기 아파트에 사는 서민들은 더 고단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강산이 몇 번 변하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출퇴근하면서 지하철 7호선을 수없이 이용했지만, 용마폭포공원이 있는 용마산역에 내리지 않았다. 그냥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를 찾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은 석산을 마주하고 아직 남아있는 그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다. 오랜 시간 망설이다가 며칠 전 햇살이 뜨거운 날 골목을 걸어 올라 용마폭포공원 앞에 섰다. 세월은 폭포처럼 흘러 그 시절로부터 56년이 지났다.
어린 시절 여기 석산에서 놀던 친구들은 다 어디서 살고 있을까. 나는 그 시절이 춥고 배고프고 더러는 서러운 기억 정도로 남아있지만 그 시절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폭포 옆에 오래 머물다가 용마산역으로 내려오다 보니 멀리 인수봉과 백운대가 보인다. 지금 나는 그 산 아래 살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손웅익 건축사·수필가 wison7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