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주 더봄] 십년지기 폴스미스 서류 가방이 내게 가르쳐준 것

[권혁주의 Good Buy] 새로운 것을 선호하는 시대 오래된 것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다

2025-06-18     권혁주 쇼호스트

내 경우는 이렇다. 유럽 여행에서 만난 어느 ’오래된’ 건물의 내력과 어떤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는 ’물려받은’ 시계의 서사 등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흔히 ‘오랜 것’을 낡고 불편함이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시간의 깃듦과 더해진 기억으로 여긴다.

그래서 내겐 오래 쓴 물건이 꽤 있고, 그런 물건들을 보면 애틋하다. 어느덧 10년째 들고 있는 '폴스미스(Paul Smith)' 브랜드의 서류 가방 역시 그러하다.  

폴스미스 서류 가방 /권혁주

이 가방의 용도는 확고했다. 지난 10년 동안 면접이든 결혼식이든 출근이든, 반듯한 정장 슈트를 입어야 할 때면 습관처럼 손이 닿는 가방이었다. 그 덕에(?) 겉면은 조금 낡았다. 자주 메고 오래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손잡이 가죽 부분은 반들반들 윤이 나고 모서리는 색이 바랬다. 새것 같은 반짝임은 없지만, 이 가방에는 시간의 흔적과 마음의 기록들이 있다. 새 가방의 매력이 ‘모두를 위한 기능’이라면, 오래된 가방의 매력은 ‘나만의 이야기’다.  

당연히 이 가방에도 ‘새것’이었던 시절이 있다. 처음 이 가방을 손에 쥐고 눈으로 보았던 때를 기억한다. 가죽 특유의 묵직한 질감, 부드럽지만 단단한 테두리, 은은한 광택감이 도는 깊은 남색. 작고 겸손하게 각인된 브랜드 로고. Paul Smith. 단정하면서 위트 있는 -마치 내 성격을 닮은- 디자인이었다. 

이 가방은 단지 물건을 담는 용도가 아닌, 내게 ‘태도’를 정리해 주는 장치였다. 사회생활 초입의 어설픈 정장 슈트 차림도 이 가방 하나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고, 어깨에 메면 한결 정돈된 마음가짐을 느낄 수 있었다. 네이비 컬러 사각형의 가죽 가방이라 검정이나 회색 수트는 물론, 겨울에는 카멜 컬러의 코트나 브라운 슈즈와도 잘 어울렸다. 

그렇게 이 가방은 자연스레 내 ‘겉모습’을 완성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 가죽은 유연해지고 손잡이는 내 손의 형태를 닮아갔다. 어깨끈은 내 체형에 맞게 길들었고, 가방 속 공간에는 늘 같은 자리에 펜과 작은 수첩이 들어갔다. 그렇게 이 가방은 나와 함께 일을 배우고, 실패를 견디고, 성장을 맛보며, 어느새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사람들은 새것을 선호하고, 새것을 찾는다. 최신형, 미개봉, 신상. 이런 매혹적인 단어들이 얼마나 ‘마법’ 같은 판매고를 견인하는지, 쇼호스트로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매장 입구의 선봉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건 ‘신상품’이다. (하다못해 대형서점 매대조차도 신간을 요충지에 배치한다)

유독 한국인이 신상에 기민한 걸까? ‘좋은 것은 새것, 새것은 좋은 것’이라는 공식에서 자유롭고 싶지만 벗어날 수는 없다. 새것의 반짝거림에 미혹되는 마음은, 잘라도 다시 자라는 손톱처럼 언제나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것의 의미를 ‘일부러’ 되새겨본다. 단맛처럼 혀에 착 감기는 “오래 쓰고 낡았으면 버려야지”라는 말보다 “오래 쓴 시간만큼, 남아준 관계와 기억에 감사하자”는 말을 먼저 뱉어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래 어쩌면, 이 가방이 지난 10년 동안 당당한 마음을 잡아주는 삶의 균형추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은, 가장 오래된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 가방을 더 이상 들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고 잃어버린다든지, 감당할 수 없는 오염을 당한다든지) 그런 날이 오더라도 이 가방과 함께했던 시절과 감회를 기억한다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물성에 안타까워할 마음을, 조금은 덜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성경제신문 권혁주 쇼호스트 kwonhj100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