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移민국] (1) 나이지리아·가나에서 동두천·파주로···둥지 튼 아프리카계 이주민

외곽 도시 빈 공간, 이주민 삶의 터전으로 임대료·언어·노동여건 따라 형성된 생활권 저출산 시대 스스로 돌봄 공백 메우는 이들

2025-08-25     박소연 기자

2024년 기준 한국 체류외국인은 265만명, 전체 인구의 5.2%에 이른다.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며 다민족 사회이자 글로벌 이주국가를 향해 진입한 상태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단일민족 도그마에 머물러 있다. 이 시리즈는 전국 곳곳에 형성된 이민자 커뮤니티를 직접 방문해 체류 외국인의 생활 양식을 등을 기록하고 지역별 이주사회의 모습과 서사를 ‘이민자 지도’로 구축하는 것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이후에는 외국인 비자 제도 전반과 주요 체류 자격별 현황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이민 정책의 큰 그림을 조망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이민정책 전반을 통합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시스템의 필요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짚어볼 것이다. [편집자주] 

“보산동에선 개도 달러를 물고 다녔다고 했어요.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요.”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과 파주시 법원읍. 한국전쟁 이후 북방 방어선 확보를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미군이 장기간 주둔했던 대표적인 접경 도시다. 1953년 휴전 직후 텐트촌으로 시작된 캠프 케이시는 한동안 주요 작전 기지로 활용됐다.

미군으로선 최전방 군사기지였기 때문일까. 이곳은 흑인 병사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자연스럽게 장기 복무나 지역 주민과의 혼인을 통해 생활 기반을 마련한 흑인 병사가 늘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달러는 지역경제를 달궜다. 기지촌이 형성됐고 미군 병사 봉급날은 흥청망청했다. 

파주에 위치한 디자인교회 부설 조이하우스에서 아프리카계 이주민 아동들이 일과를 보내고 있는 모습 /장세곤 기자

그러나 미군 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동두천과 파주 지역경제는 얼어붙기 시작했다. 기지촌을 달구던 달러가 끊기자 사람도 빠져나갔다. 공실도 늘었다. 그렇게 쇠락해가던 도시에 새 이주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프리카계 이민자였다.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쌌고 영어가 통했고 무엇보다 흑인에 대한 지역민의 거부감이 적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연으로 한국에 건너온 아프리카계 이주민에겐 한국 사회의 배타적 시선이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장벽이었다. 그런데 동두천과 파주는 흑인 병사에 이미 익숙한 지역이었다.

여성경제신문은 지난 5월부터 6월까지 동두천과 파주 현지를 찾아 아프리카계 이주민들의 생활권과 공동체 형성 과정을 취재했다. 외국인 상점이 밀집한 거리에서 직접 이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지역 교회와 아동 돌봄 공간 등을 중심으로 이들이 어떻게 생활 기반을 확장해 가고 있는지를 기록했다.

동두천 관광특구 '캠프 보산(Camp Bosan)' 밤 거리 모습 /장세곤 기자

동두천 외국인 관광특구의 상권에는 레게머리 전문 미용실, 아프리카 식료품점, 미용용품점 등이 밀집해 있으며 진열장에는 전통 음식 재료와 의상 등이 전면에 내세워져 있다. 그러나 낮에는 셔터를 내리거나 불만 켜둔 채 영업 여부를 가늠하기 어려운 가게가 많다.

단순한 영업 패턴이 아니라 자영업과 단기 노동을 병행하는 이주민의 불안정한 생활 여건과 일부 미등록 체류자의 낮 시간 외부 노출 회피 등 법적·사회적 제약이 맞물린 결과다. 실제로 주요 영업시간은 미군 외출과 맞물리는 저녁 이후에 집중되며 거리의 상권 작동은 지역의 경제 구조와 이주민들의 체류 현실을 함께 반영하고 있다.

상점 거리에서 만난 지나(9세·가명)와 오빠 사무엘(10세·가명)은 한국에서 태어난 아프리카계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다소 느린 말투였지만 한국어를 잘 알아들어 기자와의 소통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인근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제니는 “반 친구는 14명인데 대부분 한국인이고 이주민도 몇 명 있다”며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미술과 수학”이라고 답했다. 부모님은 각각 옷 만드는 일과 가게 운영을 하고 있으며 집은 가게에서 걸어서 약 20분 거리라고 설명했다.

나이지리아, 가나,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아프리카계 이주민이 동두천과 파주 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사진은 파주 조이하우스 실내 전경 /장세곤 기자

이주민이 직접 운영하는 상점에 방문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한 생필품 가게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던 시모나 씨(25세·가명)는 서울에 살면서 언니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가게를 봐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언니는 이 가게를 꽤 오래전부터 운영해 왔다”면서 “언니가 왜 한국으로 왔는지는 본인이 직접 이야기해야 하는 부분”이라며 말을 아꼈다. 기자에게 언니와 영상통화를 직접 연결해주기도 했지만 언니는 “인터뷰에는 응할 수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한국인 상인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의류 매장을 운영하는 한 상인은 “예전에는 아프리카계 손님이 많았는데 요즘은 많이 빠졌다”며 “특히 미군 부대 일부가 평택으로 옮겨간 뒤 그들을 따라 평택으로 간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또 다른 상인은 “식재료나 생필품을 다양하게 구매해 가는데 요즘은 필리핀 식품이 잘 팔리기도 한다”며 “주점은 낮에 문을 닫으니 골목이 조용한데 밤이 되면 음악을 크게 틀고 영업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동두천·파주시 등록외국인 중 나이지리아 출신이 604명으로 가장 많았고 가나(271명), 남아프리카공화국(118명)이 뒤를 이었다. 세 국가 출신만 합쳐도 1986명으로 경기도 전체 동일 국적자 수(2954명)의 67%에 달한다.

이주민 통계 관리 체계와 관련해 파주시청 관계자는“시청은 출입국 사실 증명, 외국인 등록 사실 증명 등 민원서류 발급 업무만 담당할 뿐 미등록 체류자를 포함한 통계 추정치나 체류 관련 통계는 따로 집계하거나 열람할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동두천시청 관계자는 “등록된 체류자만 통계에 포함되며 미등록 체류자는 집계 방법이 없어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다. 시청은 자체적으로 통계를 내는 것이 아니라 법무부에서 받은 자료를 그대로 활용해 홈페이지에 게재한다”고 말했다.

박혜원 자유로운교회 목사가 여성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장세곤 기자

동두천에 위치한 자유로운교회는 이주민 밀집 지역에서 종교 활동과 생활 지원이 결합된 복합 거점으로서 기능한다. 종교적 목적을 넘어 미등록 이주민의 생활권 보장과 지역 사회 내 갈등 방지를 위한 대안적 역할을 하고 있다.

박혜원 목사는 외국인 노동자 사역 경험이 있는 인물로 서울의 대형 교회를 떠나 이주민 밀집 지역에 직접 교회를 개척해 활동하고 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미등록 이주민들이 신장 투석 등 고비용 치료에 직면한 사례가 늘자 후원 연계와 의료기관 동행 등 간접적 의료 지원까지 도움의 범위를 확장했다. 경기 양주 경기북부이주민센터장을 지내며 아프리카계 이주민과의 만남을 시작하게 됐다.

박 목사는 “이주민들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교회 활동을 통해 시작된 건 아니었다”며 “푸드뱅크 운영, 생필품 지원 등의 활동을 통해 그들과의 관계가 생겼고 내가 목사라는 걸 알게 된 분들이 예배를 요청해오면서 교회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아프리카 목회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경기북부이주민센터장으로서 돕는 역할만 하겠다고 했다”며 “시간이 지나도 그 제안이 마음에 자꾸 남았고 결국 2018년 4월 1일 부활절, 동두천에서 첫 예배를 열게 됐다”고 회고했다.

아프리카계 목사의 인도로 동두천 자유로운교회에 모인 이주민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장세곤 기자

아프리카계 이주민 목사의 인도로 예배가 시작되자 이주민들이 하나둘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설교로 문을 연 예배는 이내 찬송가와 함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두 시간 남짓 이어졌다. 약 12명의 이주민이 모인 가운데 시작됐으나 점차 참여 인원이 늘어 예배 중반에는 약 30명가량 자리했다. 한국식 복장을 한 이주민도 있었고 전통 무늬가 돋보이는 아프리카식 의상을 입은 이들도 눈에 띄었다.

박 목사는 “처음에는 나와 부목사가 번갈아 가며 설교를 했는데 한국어 원고를 번역해 읽는 수준이라 전달력도 떨어졌고 문화적인 코드도 맞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다”며 “현재 3년째 설교를 맡고 있는 써니 목사는 원래 일반 성도로 교회에 출석했는데 다른 교인들로부터 목사라는 말을 듣고 설교를 부탁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자유로운교회에서 운영 중인 치과 진료소에서 이주민이 치료를 받고 있다. /장세곤 기자

아프리카계 이주민들은 교회 3층에 마련된 치과 진료소에서 정기적으로 무상 진료를 받는다. 박 목사는 “치과는 현재 매월 첫째, 셋째 주 일요일마다 운영되고 원장님뿐 아니라 치위생사도 전원 자원봉사자다”라며 “운영비는 병원 월세, 공과금, 난방비 등의 유지비를 교회에서 부담하고 재료비 등은 원장님이 책임진다”고 말했다. 이어 “진료는 100% 예약제로만 받는다”며 “처음 선착순으로 운영할 때는 3~4시간 기다려도 못 받고 돌아가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진료일마다 고정 20명은 이용한다”고 설명했다.

이주민 사역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자 박 목사는 아이들을 언급했다. 그는 “처음엔 어른들 위주로 사역했는데 변화가 너무 없어 번아웃이 오기도 했다”며 “2년 전부터 주말에 공부방을 열고 있는데 아이들이 꿈을 갖고 공부하는 걸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자유로운교회에서 주말마다 운영 중인 공부방의 모습. 한국인 교사와 이주민 아이들이 간식을 먹고 있다. /허아은 기자

이곳 공부방에서는 초등들이 주말마다 수업을 받는다. 한국에서 태어난 경우도 있고 중도 입국한 사례도 있다. 언어 능력과 학업 수준에는 편차가 크며 그날 치 수업이 끝난 뒤에는 옆방에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경우 한국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영상 콘텐츠를 즐겨보며 유행하는 ‘밈’에 능통하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제임스(12세, 가명)는 담당 선생님 강민범 씨와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소통했지만 친구들과는 영어만으로 대화했다. 강씨는 “한국어를 잘 하는 아이라도 부모님과 영어를 쓰다보니 그쪽(영어 소통)을 더 편해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제한빈 씨 역시 주말마다 아이들을 2시간씩 맡아 가르친다. 제씨는 “아이들 학업 수준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열심히 하려는 학생이 과반이라 잘 가르쳐주려고 한다”고 했다. 제씨는 용인에서 매주 동두천까지 왕복하며 교육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자유로운교회 예배에 참석한 이주민들 /장세곤 기자

사역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점으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반복된다는 점을 들었다. 문화적 차이를 고려해 가능한 한 존중하려 했으며 지금은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박 목사는 “문화적 배경이 다르다 보니 시간 개념이나 약속에 대한 인식 차이가 있어 예약을 하고도 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며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아 관련 논문까지 찾아봤는데 광활한 자연환경, 불확실한 생활 조건, 반복되는 사고 등이 시간 개념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를 접하면서 조금씩 이해의 폭을 넓혀갔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이주민들이 한국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생활 방식에 대한 이해와 적응이 필수적이라고 짚었다. 특히 시간 약속을 지키거나 병원 진료를 사전에 예약하는 문화처럼 한국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생활 습관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일상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이 단순한 생활 편의를 넘어 이주민들이 사회적 신뢰를 형성하고 지역사회와 조화롭게 공존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파주 디자인교회 부설 조이하우스에서 이주민 교사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허아은 기자 

파주 외곽 지역에도 아프리카계 이주민 가정이 생활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폐차장, 고물상, 구제 의류 공장 등 단순노동 중심 사업장이 밀집한 산업 구조와 낮은 임대료, 외곽 지역 특유의 주거 여건 등이 정착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런 환경에서 운영되고 있는 디자인교회 부설 조이하우스는 단순한 아동 돌봄 시설을 넘어 이주민 가정의 생계를 뒷받침하고 자녀 교육과 안전망을 제공하는 생활 기반 인프라로 기능한다.

이곳에는 현재 약 30명의 아프리카 이주민 가정 아이들이 머물고 있다. 나이지리아, 가나,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온 외국인 여성들은 폐차장이나 구제 의류 공장 등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간다. 낮에 아이들을 돌볼 수 없어 조이하우스에 맡기고 출근하는 경우가 많다.

돌봄 공백을 스스로 메우는 이들의 자발적 돌봄 노력은 저출산·고령화라는 인구 구조 변화 속에서 한국 사회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조이하우스처럼 이주민 공동체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생활 돌봄 시스템은 지역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대안적 모델로 기능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날 현장에서 조이하우스를 운영하는 이인자 센터장을 만나 조이하우스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조이하우스의 시작은 2016년, 디자인교회가 독거노인에게 반찬을 나누는 봉사를 하던 중 우연히 만삭 임산부를 만나며 그들의 상황을 알게 된 데서 비롯됐다. 이 센터장은 “파주 용주골에서 만삭이 된 아프리카 엄마가 울고 있는 걸 봤다”며 “예배에 오라고 하니 첫날에는 두리번거리며 앉아 있다가 음식을 주니까 가져갔는데 그다음 주에 또 다른 아프리카 여성 두 명을 데리고 다시 왔다”고 회상했다.

파주 디자인교회 부설 조이하우스에서 이주민 교사가 아동들에게 제공할 간식을 준비하고 있다. /장세곤 기자

아이들을 교회로 데려오기 시작한 계기는 이주민 가정의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이 센터장은 직접 이주민 가정을 방문했을 때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집 안에서 아이들이 물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지저분한 환경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유치원 교사 출신인 그는 세심한 돌봄이 일상인 보육 환경에 익숙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방치된 채 지내는 아이들의 상황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부모들이 처한 노동 환경은 이 아이들의 돌봄 공백과 직결돼 있었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20대 후반으로 폐차장, 폐 고물상, 구제 옷 공장 등 국내외 노동자 모두가 기피하는 업종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주민 여성들에게 일자리가 생길 때면 이 센터장은 직접 차량으로 근무지까지 데려다준다. 한 번은 김치 공장에 일자리가 나자 이주민 여성을 데려다줬지만 현장에서 ‘아프리카 사람은 안 된다’는 이유로 채용을 거절당한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본국에서 교육을 받고 전문성을 쌓았던 이들도 한국에 오면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찾기 힘든 현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 센터장은 “아프리카에서 교육도 받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한국에 오면 모든 게 ‘제로 베이스’가 된다”며 “공장 일조차 구하기 쉽지 않고 자신들의 배경이나 지식을 인정받을 통로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영국에서 공부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선생님, 고고학 전공으로 한국사에 해박한 선생님 등 다양한 배경의 이들이 이곳에서 함께해 왔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이주민들이 단순한 생계 그 이상을 꿈꿀 수 있도록 도울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장소만 허락된다면 소규모로 미용실, 이발소, 식당 같은 것을 운영할 수 있는 작은 커뮤니티를 만들에 이들에게 공간을 대여해 주고 스스로 먹고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고 싶다”며 “이주민들에게도 양지로 나와 일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아래 영상은 구글LM으로 제작한 오디오뉴스를 유튜브용으로 만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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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여성경제신문 박소연 기자 syeon0213@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