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미 더봄] 고군분투 3대 가족의 미국 한 달 살기(2) - 바디랭귀지
[이수미의 할머니 육아] 궁하면 통하는 법 신기하게도 다 살아진다
한 달 동안 렌트했던 미국 집은 넓은 마당과 방, 욕실이 각각 두 개씩 있고 거실이 있는 전형적인 미국식 주택이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들어갔던 큰애는 방학이면 여행을 다니느라, 주말이면 공부에 아르바이트에 거의 집에서 생활할 일이 없었다.
그 와중에 받은 한 달 연수는 일인 동시에 휴가이면서, 공부인 동시에 매일 아기를 볼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 게다가 아침저녁으로 엄마 밥을 먹을 수 있다니··· 살림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딸아이로선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엄마가 해준 아침밥을 먹고 딸아이가 병원으로 출근하면, 나는 손주를 유모차에 태워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입주한 첫날 주인아저씨가 종이에 손으로 그려 준 약도를 들고 동네 마트와 놀이터, 바닷가와 공원을 순례했다.
참으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였다. 딸아이가 오후에 퇴근하면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보스턴 시내의 박물관, 미술관, 과학관을 매일 찾아다녔다. 딸과 셋이 다닐 때야 불편한 게 없지만 손주만 데리고 동네 마트에라도 가려 하면 영어가 달려 심장이 요동을 친다.
우유와 기저귀는 항시 넉넉히 여분이 있어야 하는데 마트마다 살 수 있는 품목이 다 다르고 유모차 짐칸에 실을 수 있는 양이 적다 보니 하루에 두 번씩도 장을 봐야 했다. 그래도 노약자 둘이 유모차를 끌고 밀며 쇼핑을 하노라면 많은 이들이 도움을 준다.
유모차와 함께 횡단보도에 서 있으면 모든 차가 정지한다. 신호와 상관없다. 겨우 걸어 다닐 법한 할아버지도 순서를 양보하시고 계산대에서 어리바리 돈을 세고 있으면 캐셔가 내 손에서 돈을 가져가고 잔돈을 사뿐히 되돌려준다.
지금도 생각나는 단어는 팬티형 기저귀 'Easy-Up'. 수백 개의 기저귀 속에서 개월 수와 몸무게를 계산해 고르고 골라도 이상한 걸 사 와서 못 쓴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 신기하게도 다 살아졌다. 13개월 손주는 말을 못 했지만 놀이터에 가면 잘도 놀았다. 미국 아이들도 무슨 말을 하고, 손주도 무슨 소리를 내는데, 그게 다 통하는지 웃고 손도 잡고 미끄럼틀도 타고 아주 잘 논다.
지금도 그때의 사진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아기를 데리고 겁도 없이 동네를 쏘다녔을까···’하는 마음이 든다.
돌아올 때쯤 되자 말이 안 나와서 문제지 그들이 천천히 해 주는 말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년쯤 살면 입은 안 트여도 귀는 트이겠구나 싶기도 하고 한 달만 더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 많은 짐을 싸고, 집을 정리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미국을 떠났다.
젊은 시절의 배낭여행처럼 호기와 즐거움이 가득한 출발은 아니었으나 아기를 데리고 병 안 나고, 안 다치고,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 무색하게 씩씩하게 한 달을 보냈다. 나와 딸아이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추억이었건만 손주가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한다는 것이 아쉬운 미국 한 달살이였다.
여성경제신문 이수미 전 ing생명 부지점장·어깨동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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