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라 더봄] 현대의 미술관이 과거 교회가 했던 역할을 대신한다?
[윤세라의 미술관에서 만나는 세계와 나] 영혼을 위로하고 풍요로운 경험 제공하는 공간 美 글렌스톤 뮤지엄, 위로·영감 주도록 디자인
미술 칼럼 요청을 받고 처음부터 기존 매거진 칼럼과는 다른 관점과 새로운 경향에 대한 나의 관심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한국 미술 시장에서 젊은 수집가들의 높은 관심은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디지털 아트, 온라인 거래, SNS를 통한 작품 공유 등 다양한 감상 방식과 함께 미술 시장은 확장되고 있다. 특히 서울은 세계적인 메가시티로서 미술 전시 공간과 시장 규모 면에서 서양이나 중국, 일본에 뒤지지 않는 세계 미술 시장의 주요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시와 작가에 대한 정보, 미술 이론과 역사에 관한 각종 교육 프로그램도 풍부하며,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문화국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나는 이 칼럼을 통해 전통적인 미술 전시 공간을 확장하고, 모든 문화 예술 경향의 경계를 넘나들며 통섭하는 전시와 색다른 도전을 시도하는 작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 미술계가 보다 다채롭고 자유로운 창작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예술과 미술관의 전통적 역할뿐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자아실현, 그리고 다양하고 독특한 예술 정신의 발현이라는 측면에 주목하여 현대 미술의 새로운 방식과 다양한 형태를 제시하고 싶다.
현대 사회 미술관의 역할
현대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아름다움과 연관되는 미적 기능이다. 이를 위해 매력적이고 독특한 작가와 작품은 필수적이다. 미술관은 예술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자아실현을 위한 영감을 얻고, 최대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잘 갖춰진 레스토랑, 카페, 도서관, 기념품 가게 등 편의 시설을 제공하기도 한다.
둘째, 현대 미술관은 교육적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한다. 많은 미술관은 모든 사물과 시설을 학습 호기심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구성하고,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자료들을 통해 다양한 문제에 관한 연구 기회와 경험을 제공한다.
셋째, 현대 미술관은 소속된 사회와 관련된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제도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 미술관은 공동체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며, 이를 통해 긍정적인 문화적 가치를 다음 세대로 전달한다. 이러한 보존 시스템이 없다면 문화와 예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화할 수 있으므로 그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이 칼럼에서 현대 사회의 미술관이 우리의 내면을 성숙시키고, 한 인간의 영혼을 깊이 성찰하는 수행의 여정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근무했던 미국 워싱턴 D.C. 근교 포토맥 지역의 글렌스톤 뮤지엄(Glenstone Museum)은 자연, 건축물, 미술 작품을 통해 인간에게 위로와 영감을 주도록 디자인된 곳으로, 현대사회 속 미술관의 확장된 기능과 역할을 선도하는 미술관이다.
흔히 미술관은 제한된 공간 속에 전시된 작품을 감상하는 곳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글렌스톤 뮤지엄은 약 40만 평(약 132만2310㎡) 규모의 자연 속에 전시 공간이 안팎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건축물 자체가 조형물처럼 느껴지고, 야외 조형물들은 나지막한 구릉, 계곡, 언덕, 초원 곳곳에 자리하며 자연 속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사색의 방향을 제시한다. 캠퍼스 중앙의 카페와 레스토랑마저도 감상과 명상의 여정을 방해하지 않도록 단순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성소(Sanctuary), 그들만의 신성한 곳(Sacred place), 성지순례(Pilgrimage) 등으로 표현한다. 아마도 그곳에서 명상과 사색을 통해 자아 성찰, 치유, 혹은 자신과 신의 만남과 같은 신성한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글렌스톤 뮤지엄은 방문객들의 사적인 공간을 최대한 보장하여 그들만의 여정을 돕고 격려하는 시스템을 운영한다. 그 외 여러 혁신적인 미술관의 정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나는 이 새로운 개념의 미술관 시스템을 한국에 소개하여 우리 미술계가 더욱 다양한 형태로 미술관 공간을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술관, 영혼을 위로하고 풍요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
현대 미술관이 영혼을 위로하고 영감을 주며, 새롭고 풍요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까? 영국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저서 <영혼의 미술관>에서 현대 미술관이 과거 교회가 했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미술관을 종교적 공간인 교회처럼 인간의 영적, 감정적 욕구를 채우고 세속적인 삶의 어려움을 위로하며, 예술을 통해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공간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장소는 침묵, 인내, 경외를 권하며 잠시 머무르며 잡담을 나누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품는 것을 부적절하게 느끼게 한다.
즉, 미술관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탐미하는 곳을 넘어 인류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 깨달음을 얻으며 치유받았던 신성한 공간인 교회의 기능을 현대 사회에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 공간의 예술 작품들은 어떻게 교회의 역할에 기여했을까?
교회의 그림, 벽화, 성상, 스테인드글라스, 조각품 등은 신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경외감과 기도를 불러일으키며 신과 연결되도록 이끌었다.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과 상징적 의미는 교회 내 경건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예배 경험을 향상시키고 믿음의 가치를 증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종교화나 건축물, 그 외 예술품들로 장식된 교회는 르네상스라는 화려한 문화 미술 역사를 발전시키고 많은 예술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친 과시와 경쟁은 교회가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고, 교회 안의 모든 성상을 비롯한 예술품을 금기시하는 종교개혁이라는 극단적인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예술을 통한 영혼의 구원과 더 나은 삶
그렇다면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은 어떻게 교회가 했던 것처럼 영혼을 구원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격려할 수 있을까?
먼저 예술을 정의해 보자. 어떤 이는 예술의 목적이 사람들 사이에 공감의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했고, 다른 이는 예술이 감정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일종의 감정 통로, 즉 치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예술은 단순한 미적 탐닉 이상의 도구로서 우리 안의 더 중요한 목적을 수행하고 심리적 약점을 보완하며 능력을 확장할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좋은 예술 작품은 우리가 타고난 불완전하고 불안한 기억들에 대한 해독제 역할을 하기도 하고, 보는 이의 기억의 핵심을 찌르기도 한다. 물론 예쁘고 긍정적인 의미의 사진과 같은 아름다움은 특정 감성을 자극하며 주변의 불공정함에 대한 비판적인 경각심을 무디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취향일 수 있으며, 그 유쾌함은 성취감을 주고, 그것이 주는 희망은 더 큰 가능성을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는 무한한 가능성의 에너지를 만들고, 희망의 부재로 인한 현대인들의 파멸을 막기도 한다. 결국 미술관은 전통적인 교회가 제공했던 관조와 성찰의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관에서 나를 발견하고 내면을 성찰하며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을까?
페 이 스 링 골 드 ( F a i t h Ringgold)의 1988년 작품 '타르 비치(Tar Beach)'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며, 우리는 세상의 문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갈등적인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태도를 통해 격려를 받을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거부와 굴욕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밝고 평온한 우리 자신의 일부를 마주하게 하며, 권력 앞에 무력한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우리는 무한한 내면의 모순을 지닌 존재이기에, 예술은 긍정적인 감정에 대한 능력을 확장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을 온전히 수용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존엄성을 가지고 '좋은 삶에서 슬픔이 차지하는 정당한 자리'를 상기시킴으로써 우리를 더 온전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고통이 아름다움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경험하는 미술관
예술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일 중 하나는 더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예술가의 '잠재된' 슬픔은 심리적 감정의 승화 과정을 통해 고통이 아름다움으로 변모하는 경험을 하게 한다.
이러한 사회적 표현은 일종의 긍정적인 존엄성을 부여하며, 고통 속에서 외로움을 덜 느끼도록 도와준다. 그것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고통을 건드려 웅장하고 진지한 관점으로 직면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탄생의 기회를 주기도 한다.
내면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미술관
미술관은 모순의 집합체인 우리가 한 방향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너무 안일하거나 불안해하고, 너무 신뢰하거나 의심하며, 너무 진지하거나 가벼운 경향이 있을 때 잃어버린 성향을 바로잡아 내면의 균형을 회복시켜 줄 수 있다.
우리의 취향은 자극과 강조를 통해 내면의 연약함을 보완하고 실행 가능한 수단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작품을 갈망하게 만들어 그 미덕이 표현된 작품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러나 강요된 위협이나 지나친 억압감을 느끼게 하면 저항과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나타난다. 예술은 내면의 온전함을 약속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선해지기를 갈망하며 그 열망은 때때로 동기를 잃기도 하지만 예술 작품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내면의 선함을 회복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과제는 균형 잡힌 좋은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해 새로운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균형과 선함을 상기시켜 시간을 절약하고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미술관에서 다시 만난 자신
미술관에서 어떤 작품은 우리가 명확하게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집착하고 있는 경험의 일부를 선명하게 이해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한다. 피상적인 해석을 넘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신하도록 격려하며, 우리의 의식을 명확하게 하고 자신을 이해하게 한다. (참고 이미지: Jeff Wall, Picture for Women, 1979)
미술관에서 성숙하는 자아
예술은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외에도, 낯선 것에 대한 만성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고 미지의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경계를 확장하고 성장하게 한다.
예술에 대한 참여는 낯선 것에 대해 더 열린 마음을 갖게 하고, 자신과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스스로에게 온화해지도록 돕는다.
이를 통해 그것이 완전히 자연스럽다는 것을 인식하고 외계 예술을 창조한 바로 그 마음들과 우리 자신을 더 친숙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그들의 삶과의 연결 지점을 찾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의력은 우리 주변의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눈가리개를 걷어내고, 우리가 기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것도 진정으로 흡수할 수 있게 한다.
미술관에서 만나는 평범한 것들에 대한 재조명
우리의 주요 결함 중 하나는 주변에 있는 것을 제대로 주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의 가치를 잊고 다른 곳에 있는 상상 속 매력을 갈망한다. 예술은 습관을 거스르고 우리가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것을 재조정하도록 초대함으로써 익숙함을 더 멋지고 즐길 만한 것으로 바꾸기도 한다.
재스퍼 존스(Jasper Johns)의 유명한 청동 주조 맥주캔(Painted Bronze, 1960)은 일상적이고 익숙한 물건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무겁고 값비싼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캔의 낯섦과 기이함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어 마치 캔을 처음 보는 어린이나 화성인처럼 주변 세상을 더 다정하고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교훈을 준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다. 우리가 인위적인 위대함을 추구할 때 자주 간과하는 평범한 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동시에 기념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일상의 풍요로움을 일깨우고 무뎌진 감성을 다시 민감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예술은 반복되는 직장 생활, 중년의 불완전함, 좌절된 야망 등 우리의 부정적인 상황을 최소화하고 자신을 더 공정하게 대하며 진정한 삶의 가치를 다시 깨닫게 한다. (참고 이미지: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의 다양한 작품)
오늘 미술관에서 어떤 작품이 나를 흔들어 감춰진 나를 해방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려면, 침묵하고 고독해야 한다. 어설픈 도슨트의 참새처럼 되풀이되는 뻔한 정보들이 나의 자유로운 사유를 방해하지 않도록, 오로지 그 공간 속에 홀로 자신과 잠시 마주 서야 할 것이다.
여성경제신문 윤세라 Glenstone Museum 근무 lovelysarah061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