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기 더봄] 삶의 마지막에 머무를 곳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 좀 떨어진 뒷산에 공원묘지를 조성한다는 얘기가 돌았다. 가까운 곳에 그런 시설이 들어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죽어서 집 가까이에 묻히면 가족이 방문하기도 쉽고 망자 또한 그러하기를 바라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며칠 후 우리 지역에 혐오시설의 건립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거리에 걸렸다. 아파트 게시판에도 연판장이 올라왔다. 반대의 논리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집값이 내려간다는 것이다. 시민들의 민원 때문인지 결국 공원묘지는 들어서지 못했다.
오래전에도 같은 이유로 서초구 원지동에 화장장을 건립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사실 원지동에 화장시설이 들어서기까지 서울에는 화장장이 없었다. 인구는 수도권으로 집중하는데 묘지나 화장장은 혐오시설로 인식되어 들어서지 못한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 학교 주변에 납골당 건축을 불허하는 판결을 내린 적도 있다. 학생들에게 사람들이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교육적으로 좋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요즘도 주거지 가까이에 추모 시설을 조성하려는 지자체가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난항을 겪고 있다.
자녀를 출가시킨 부모의 바람은 자식을 지척에 두고 자주 보는 것이다. 함께 살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까이 있으면 하는 것이 어버이의 희망이다. 아마 혼이 있다면 죽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나 현실에선 그럴 수가 없다. 자식 세대가 집값이 내려간다고 반대하기 때문이다.
한식이나 추석이 되면 우리 사회는 성묘 하러 가려는 차량으로 교통이 복잡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까이에 묘지가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딱히 명절에 가지 않고 어린 자녀와 함께 수시로 찾아갈 것이다. 아이들도 자연히 죽음에 대해 배우게 되는 교육의 장이 될 수도 있다.
결혼식에는 가지 못하더라도 장례식에는 꼭 참석하라는 얘기가 있다. 좋은 일에 기쁨을 나누기보다 슬픈 일에 참석하는 것이 관계 유지에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성경에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말씀이 있지 않은가. 사람의 끝을 보고 평소 자신의 마음을 잘 가다듬으라는 뜻이리라. 동네 가까이에 공원묘지가 있다면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주 휴가를 내어 남해 독일마을에 다녀왔다. 그곳은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독일에 파견되어 급여로 받은 외화를 고국으로 송금한 광부와 간호사들이 남해군청의 도움으로 조성한 마을이다. 이국적인 모습이 마치 독일 거리를 걷는 느낌이다. 마을 어귀에 ‘파독 광부 간호사 추모 공원’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공원에 들어서니 잘 정비된 묘지 사이로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보였다. 묘지 사이의 잡초를 제거하고 있었다. 독일에서 간호사로 근무한 적이 있냐고 하니 그렇다고 한다. 할머니는 은퇴 후 독일인 남편과 함께 귀국하여 이곳에 거주하고 있으며 묘지는 부부가 죽으면 묻힐 곳이라고 답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독일마을처럼 묘지가 동네 어귀에 있는 곳이 종종 눈에 띈다. 우리나라도 공원묘지를 멀리 떨어진 곳에 조성하기보다 거주지 인근에 건립했으면 어떨까. 죽은 사람도 산 사람처럼 자신이 거주했던 곳과 가까운 공간에 있고 싶을 것이다.
실제 사례가 있다. 세종시를 조성하며 시 외곽에 공원묘지를 건립한 것이다. SK그룹 최종현 회장이 1998년 타계하며 500억원을 기부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LH공사는 여기에 400억원을 더해 장례식장과 화장장, 자연장지가 함께 있는 은하수 공원묘지를 조성했다.
세종시는 그 후 장사시설의 의미를 단순히 참배하고 슬퍼하는 묘지에서 시민들의 여가 및 휴식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는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어린이를 위한 생태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다양한 유실수종을 심어 도심 속 시민공원으로 꾸몄다.
세종시의 사례처럼 신도시를 건립할 때 시 외곽에 공원묘지를 함께 조성하면 어떨까. 자신이 죽었을 때 어디에 묻히기를 원하는가 상상해보면 답이 쉽게 나올 것 같다. 평소 살던 곳에서 자식이 찾아오기 좋은 곳에 있고 싶은가, 아니면 생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은가. 공원묘지를 아름답게 꾸미면 시민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질 것 같다. 이제는 묘지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여성경제신문 백만기 위례인생학교 교장 eggtre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