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 더봄] 지금이 산책하기 제일 좋은 때예요!
[김현주의 텐션업 갱년기] 인왕산 둘레길을 따라나선 유쾌하고 진지한 놀이, 도시 산책
“이건 작약이고, 저건 모란이네. 선배 두 꽃의 차이를 알겠어요?” 햇살 가득한 한옥 뒷마당에 핀 연분홍 큰 꽃을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후배가 말을 건넸다. “모란은 나무, 작약은 풀과에요. 그래서 모란은 대와 잎이 조금 더 두껍고 높게 자라고, 작약은 낮고 둥글게 펴요. 이파리도 반짝이고 하늘거리죠.” “이제 꽃도 잘 아네.” “요즘은 나무와 꽃을 찾아보면서 다니고 있어요.”
지난 주말 이 좋은 5월을 만끽하자며 친한 후배 둘과 도시 산책에 나섰다. 편한 신발을 챙겨 신고 오전부터 만나 쉬엄쉬엄 걸으며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둘러보고, 수다도 떨고, 맛있는 점심도 먹기로 했다.
경복궁역에서 필운동으로 들어섰고 홍건익 가옥부터 시작해 배화여자중고등학교로 올라갔다. 학교 안 건물 뒤로 올라가 보니 겸재 정선의 작품 ‘필운대’에서 본 적이 있는 그 필운대가 암벽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조선시대 그 자리에서 바라봤을 한양은 어땠을지 상상하며 잠시 눈앞의 서울을 내려다봤다.
학교에서 나와 종로도서관을 끼고 올라가니 인왕산 둘레길이 나왔다. 경복궁역 근처에는 자주 갔지만 매번 다니던 곳만 갔다가 금세 돌아오곤 했는데 이렇게 시간을 내 마음먹고 다녀보니 사진으로만 봤던 곳, 심지어는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곳을 발견하고 감탄하게 된다. 이게 바로 산책의 매력이다.
인왕산에 오른 적은 있지만 둘레길은 처음이라 그것도 좋았다. 올라가는 초입에 마주하게 되는 ‘황학정 국궁전시관’부터 ‘인왕산 더숲 초소책방’, ‘인왕산 숲속쉼터’ 등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들러가며 움직였다.
인왕산 중턱에 있는 초소책방은 2018년 인왕산길이 시민들에게 본격적으로 개방된 후 기존의 경찰초소를 책방과 카페가 함께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전환한 곳이다. 청와대 방호 목적으로 건축되어 50년 넘게 사용됐던 건물을 리모델링했는데, 그 과정에서 벽돌로 된 초소 외벽 일부와 철제 출입문을 그대로 남겨 뒀고 나머지는 유리 벽으로 만들어 안과 밖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탁월한 전망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수성동계곡과 윤동주문학관 양쪽에서 비슷한 거리로 올라올 수 있는 이곳에서는 통창을 바라보거나 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암벽을 끼고 만들어진 덱 등 기존 초소의 골조를 그대로 살린 이 건물의 디자인은 지역의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담은 건축물로 인정받아 2020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숲속쉼터도 군 초소였는데, 콘크리트 필로티 구조 위 패널을 철거하고 목조 건축물로 재건하여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자연 친화적인 인테리어와 인왕산 숲속 뷰가 펼쳐지는 큰 통창으로 아늑함과 개방감을 동시에 선사해 인왕산 등반 중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 역시 2021년 대한민국 건축문화제에서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윤동주도서관 쪽으로 내려와 부암동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나 사람이 덜 붐볐지만 그래도 주말 점심이라 20분은 기다렸다가 들어간 것 같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오늘 하루는 시간을 내어놓고 편하게 나섰으니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기다리는 그 시간도 즐거웠다.
우동과 카레 한 그릇씩 나누며 식사를 마치고 나니 후배가 물었다. "선배, 청운문학도서관 가봤어요? 안 가봤다고? 거기 꼭 가봐야 해!” 윤동주도서관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굳이 찾아 들어가지 않으면 몰랐을 위치다. 인왕산 바로 밑에 위치한 한옥의 독서 공간이 있는 문학 특화 도서관으로 한옥은 인왕산의 경사 지형과 자연경관을 고려하여 설계되었다고 한다.
역시 함께하는 이들이 누구인지에 따라 볼 수 있는 것이 달라진다. 친구 둘 다 걷기와 답사에 익숙한 친구들이라 그냥 겉으로 보고 지나가는 게 아닌 들어가서 읽어 보고, 궁금한 건 물어보고, 찾아보며 알아가는 과정을 흥미로워해 같이 다니면 새롭게 알게 되고 그래서 즐거운 일이 더 많아진다. 게다가 오래된 친구들과는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이전부터 지금까지 넘나들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있지 않은가.
청운동에서 효자동으로 걸어 내려올 때였다. “아, 여기가 박동자 선생님 작업실이었는데.” “맞다, 여기에 와서 매번 촬영했었어.” “선생님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한참 후에 들었는데, 알았으면 인사라도 드리러 갔을 거야.” 잡지 에디터 시절 요리 촬영을 해주셨던 요리 연구가 선생님 작업실 자리를 지나며 20, 30대 우리들이 함께했던 그 시간을 잠시 떠올렸다.
경복궁역으로 향하던 길에 류가헌 갤러리에 들렀다. 류가헌 15주년 특별전 ‘사진의 기억’을 하고 있었는데, 갤러리를 운영하는 15년 동안의 전시 기록의 일환으로 책을 엮어내고 그 책에 수록된 작품들을 전시한 기획전이다.
마침 전시 종료 하루 전날이라 갤러리에 나와 있던 박미경 관장이 고맙게도 몇 작품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책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황규태 작가의 ‘블로우업bLowup 2017’에 관한 설명은 인상적이었다.
작가가 젊은 시절 찍었던 흑백 사진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른 관점으로 확대해 다시 작품화한 것인데, 기존의 사진을 부분으로 자른 후 확대하니 입자 굵고 거친 질감이 등장해 거기서 새롭게 발견하는 생동감과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사진이 전하는 것처럼 우리도 지나온 시간을 어떤 앵글로 잘라내고 확대해 들여다볼지에 따라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아, 산책이야말로 유쾌하고 진지한 놀이라더니. 만족스러운 5월의 도시 산책이었다!
여성경제신문 김현주 공공기관인, 전 매거진 편집장 hyunjoo7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