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심 더봄] 지바현 미나미보소 - 봄바람, 꽃바람, 콧바람
[양은심의 일본 열도 발도장 찍기](33) 지바현(千葉県) 미나미보소 투어(南房総のツアー) 봄바람, 꽃바람, 콧바람 도쿄국립박물관 뒤 정원에서 꽃놀이
3월로 접어들어서까지 물러날 줄 모르는 겨울에 살짝 짜증까지 나기 시작했을 즈음 친구와 우에노(上野) 공원을 찾았다. 우리를 반긴 것은 진분홍색을 자랑하며 대롱대롱 탐스러운 꽃을 피우는 '간이자 쿠라(寒緋桜)'였다. 처음 보는 꽃이었다. 이름표가 없었으면 벚꽃인 줄도 몰랐을 터였다.
수년 전 식수하는 것을 봤을 때는 의문을 품었었다. 나무가 많은 공원 안에 새삼스럽게 또 무슨 나무를 심나 하고···. 그러나 앙상한 겨울나무 군단과 진분홍 꽃의 향연은 절묘했다.
봄방학 시즌을 맞아 반달이 넘는 긴 휴가에 들어갔다. 밀린 집안일을 처리하기도 하고, 아들한테 생일주도 받아 마시며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대로는 긴 휴가의 의미가 없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로운 일상에도 콧바람은 필요한 것인가 보다.
여행 상품 검색에 들어갔다.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노랗게 물든 유채꽃 벌판을 달리는 붉은색 기차가 달리는 모습이다. 이거다. 내 마음에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었다. 지바현(千葉県), 미나미보소 투어(南房総のツアー). 당일치기 버스 투어다. 2025년 4월 5일. 아침 7시 3분 도쿄역 마루노우치 빌딩 앞 집합, 7시 50분 출발.
조금 일찍 집합 장소에 도착했다. 몇 대의 관광버스가 보였으나 내가 탈 버스는 아직이었다. 도쿄역 앞 광장에서는 웨딩 촬영이 한창이다. 아침 햇살에 감싸인 도쿄역을 배경으로 신랑·신부는 물론 친구와 스태프들이 작은 파티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신부 친구들은 분홍색 드레스를 맞춰 입고 즐거운 표정이다.
이번 여행 참가자는 37명이란다. 예약할 때 1000엔을 더 내고 1~3열까지의 좌석을 신청했었는데 맨 앞좌석을 배정받았다. 맨 앞좌석은 눈앞 풍경을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아한다. 나 홀로 여행의 소소한 호강이다.
도쿄역을 출발하여 고속도로(首都高速)를 타고 1시간 정도 달리자 우미호타루(海ほたる)가 나왔다. 1차 휴식을 겸한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주차장에서 에스컬레이터로 3층까지 올라갔을까. 기념품 숍을 비롯한 많은 가게가 있었지만 다 패스하고 밖으로 나갔다. 바다 경치가 보고 싶었다.
테라스에서 1층을 내려다봤더니 넓은 공간에 둥글고 커다란 톱니바퀴 모양의 조형물이 있었다. 아마도 해저 터널을 뚫을 때 썼던 기계 중 하나이지 싶었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옆에 서서 올려다보니 현기증이 일 정도로 컸다. 어마어마하다. 안내판 설명을 읽어보니 역시 터널을 뚫을 때 썼던 것이었다.
화창한 날씨 덕분에 살짝 왼쪽에는 도쿄 타워가 보이고 왼쪽 끝머리에는 스카이트리가 서 있었다. 집합 장소로 돌아가려 할 때 '후지산이 잘 안 보이네'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후지산? 후지산이 보여?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찾기 시작했다.
하얀 구름 사이로 아직 흰 눈이 남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선명하지 않아도 그것은 분명 후지산이었다. 후지산, 도쿄타워, 스카이트리. 일본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들을 다 본 셈이다. 이 맛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나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휴식 타임이었다.
다음은 기차를 타고 유채꽃밭 사이를 달리기다. 나로서는 이번 여행의 메인 코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행 상품 선전 사진에 실려 있었고 그 풍경을 기대하며 선택한 여행이었다. 고미나토 철도(小湊鉄道) 요로 계곡(養老渓谷) 역에서 탑승하여 20분 정도 달린 후 사토미역(里見駅)에서 내린단다.
그런데 철도역에서 묘한 안내문을 발견했다. '~에 유채꽃은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은가. 불안했다. 내 여행의 목적이 물거품이 되는 건가? 나는 여행사에 속은 것인가? 의문이 끊이지 않았으나 그곳이 우리가 가는 곳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이기에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혹 그렇다 해도 유채꽃이 전혀 없지는 않을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20분 정도 달리는 동안 군데군데 길가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마추어 혹은 프로 사진가들인 듯했다. 그들의 앵글 안에 우리가, 우리의 앵글 안에 그들이 있었다. 그저 벚꽃 사이를 달리는 철도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도 있었다. 철도가 보이자 손을 흔들기도 하고 쫓아오며 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구경하고 있다는 희한한 느낌이었다.
사토미 역에 내리자 사람들은 끈 풀린 풍선처럼 순식간에 흩어졌다. 나 또한 일행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 풍경 속으로 퐁당 뛰어들었다. 유채꽃이 피어 있는 선로 위를 달려가는 전철 사진을 찍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익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서둘러 선로에서 빠져나와 개찰구를 통과했다. 설마 날 두고 떠난 것은 아니겠지.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좌우를 살폈다. 왼쪽은 아니다. 오른쪽을 보니 관광버스 몇 대가 보였다. 그 안에 우리 버스도 있었다.
여행 상품에 실려 있던 사진처럼 유채꽃밭 사이를 달리지는 못했으나 유채꽃과 벚꽃을 배경으로 서 있는 기차 사진은 찍을 수 있었다. 그냥 서 있는 모습일 뿐인데도 신이 나고 좋은 건 왜일까. 노랑, 연분홍, 빨강이 보여주는 색의 마술인지, 여행지라는 색다름 때문이었는지, 역 안내문에서 느꼈던 불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길 잘했다는 만족감에 젖어 들었다. 그 후로 이어진 딸기 따 먹기 체험과 '꿀 공방' 방문,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그저 덤일 뿐이었다.
겨울도 4월에는 이길 수가 없었는지 깨끗이 물러나고, 뉴스에서는 전국의 벚꽃 소식이 넘쳐났다. 버스 여행을 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봄맞이'를 잘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직 숙제가 남아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문득 도쿄국립박물관 뒤 정원 벚꽃 길이 떠올랐다. 그거였구나. 애정하는 벚꽃길을 걷지 않고 어찌 봄을 맞이할 수 있으리. 4월 6일. 마침 도쿄국립박물관 연 회원권 유효기간 마지막 날이었다. 갔다 와야지.
집을 나서려 할 때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벚꽃 사진과 함께. 뒤 정원이다! 이런 걸 텔레파시라고 하나. 나도 가려고 집을 나섰다고 하니 기다리겠단다.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마음이 바빠졌다.
도쿄국립박물관 뒷정원에 있는 벚꽃 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방금 지나온 혼잡한 우에노 공원의 기억이 멀어져 간다. 푸드 트럭에서 사쿠라 아마자케(さくら甘酒)를 한 잔씩 사 들고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나이 듦에 대해, 일에 대해, 건강에 대해. 이야기는 이어진다. 쉰아홉 살의 우리들. 초록으로 물든 정원의 생명력 덕분에 더불어 생생해진다.
3월 초에 피었던 칸히자쿠라를 다시 보았다. 어느새 꽃의 흔적은 사라지고 온통 녹색을 휘감고 있었다. 꽃은 피워본 적도 없다는 듯 오로지 다른 벚꽃들을 위한 배경 역할에 임하고 있었다. 나무가 연출하는 절묘한 풍경의 변화는 감동이었다. 정원을 관리하는 전문가들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더라.
여성경제신문 양은심 번역가(영상/책)·작가 eunsim030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