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지옥을 창조한 단테, 억울한 천재 마키아벨리
[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어쩌다 한 달, 이탈리아 (12) 르네상스의 심장, 피렌체 기르고 찬양하고 추방하라
피렌체는 지도를 펼치기 전부터 이미 내 머릿속에 있었다. 르네상스의 심장, 메디치 가문의 무대, 그리고 우피치 미술관과 꽃의 성모라 불리는 두오모가 유명하지만 내게 피렌체는 단테와 마키아벨리 두 천재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중심, 부드럽고도 맹렬한 햇살을 받으며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다시 깨달았다. 이 도시는 정말 “말이 많은 도시”라는 것을.
대개 도시가 여행자에게 조용히 이야기를 들려줄 거라고 믿겠지만 피렌체는 무대 위에 선 배우처럼 시선을 붙잡고 소리쳤다.
"보라고, 여기가 단테의 생가야!" "여기는 마키아벨리가 매일 오갔던 거리야!" “바로 이곳에서 사보나롤라는 교수형을 당하고 불태워졌지!”
이런 식이라 무심히 지날 수 있는 골목은 거의 없다. 거의 모든 코너마다 누가 살았고 무엇을 한 곳이다. 진한 역사와 예술의 증거물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계속 멈춰야 했다.
시뇨리아 광장을 걷다가, 관광객들 사이로 바닥에 박힌 작은 원형 석판 하나를 발견했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눈에 띄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교수형을 당하고 불에 태워진 곳이다.
한때 피렌체 시민들이 '도덕의 수호자’라 부르며 숭배했던 그는 이 광장에서 화장품, 책, 거울, 그림 같은 ‘허영의 물건’을 불태웠다. 그러나 그 자신도 결국 같은 시민들에 의해 광장에서 화형당한다. 지금 젤라또 트럭이 서있는 이 평화로운 공간이 불과 몇 세기 전엔 신념과 광기가 충돌하던 무대였다는 사실에 어딘가 뼈가 시렸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피렌체가 낳은, 그러나 피렌체에 의해 추방당한 시인이다. 그의 집이라고 알려진 Casa di Dante를 찾았다. 투박한 석조 건물 앞에서 나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문학 팬들의 사이에 서 있었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을 거치는 내면의 여행기지만 사실 그 속엔 피렌체 정치에 대한 뼈 있는 풍자와 개인적 원한이 가득하다. 그는 책에서 자신의 정적들을 지옥의 가장 깊은 구덩이에 쑤셔 넣었다. 요즘 말로 하면 ‘문학으로 복수한 셈’이다. 그는 최고의 인플루언서라고 해야겠다. 글 단 한 줄로 누군가의 사후 명예는 영원히 박살났으니까.
사실 단테는 처음으로 지옥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묘사한 사람이다. 막연하던 지옥과 연옥을 생생하게 창조해낸 것이다. 단테보다 한 세기 반쯤 뒤 피렌체의 또 다른 걸출한 천재 남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등장한다.
우리가 흔히 ‘마키아벨리즘’이라고 부르는 냉혹한 정치술은 그의 대표작 <군주론>에서 나온 개념이지만 그 진짜 맥락을 알고 나면 마키아벨리가 억울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단순히 “군주는 도덕보다 효율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지 않은가. 그 역시 단테와 마찬가지로 피렌체에 의해 버림받고 추방된 인물이다.
수백 년을 지난 후에도 살아있는 천재적 작가, 역사에 다시 없을 사상가는 어떻게 이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을까? 그리고 어째서 이 도시는 천재들을 그다지도 야박하게 다뤘을까? 피렌체에서는 수많은 의문과 숨가쁜 감탄을 쉼없이 쏟아내게 된다.
팔라초 베키오(Palazzo Vecchio)를 지나며 마키아벨리가 일했던 정부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궁전의 복도에서 정치를 연구했고, 스스로 “나는 국가의 비서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후대는 그를 마치 정권을 찬탈하려 한 모략가, 심지어 권력에 아부하는 야비한 책사로 해석하고 오랜 세월 동안 부정적 정치력의 대명사로 썼다. 진정으로 자기 직업에 열심이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유머 넘치던 마키아벨리에게 아무래도 너무 야박한 짓이다.
마키아벨리가 공직에서 축출된 뒤 살았던 마을을 찾아갔다. 피렌체 도심에서 남쪽으로 약 12킬로미터쯤 떨어진 산트안드레아 인 페르쿠솔레라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그의 마지막 은신처를 찾아가는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다. 그는 이곳의 작은 포도밭이 딸린 집에서 생활했다.
지금은 Casa di Machiavelli라는 이름으로 개조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지만, 당시 그는 여기서 대단히 쓸쓸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은둔’이라고 쓰면 멋져 보이지만, 실상은 쫓겨나서 근근이 살았던 것이다. 처가의 눈치를 보며 포도주를 빚고, 탁자에 앉아 플루타르코와 타키투스 같은 고전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마을 여관 주인이나 동네 농부들과 놀다가, 저녁이 되면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고대 현인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는 그의 글을 읽으면 요즘 표현대로 웃프다. 출근은 못하지만 복장은 제대로 갖춘다니, 마키아벨리답다고 해야 하나.
그 시절에 마키아벨리는 세상에 다시 나가기 위한 일종의 정치 이력서로 <군주론>을 집필한다. 메디치 가문에 바쳤던 이 책은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현실 정치에 대한 식견과 조국 사랑이 없다면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다시 공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군주론>은 출판조차 되지 못한 채 묻혔고, 살아생전에 그 누구도 그의 천재성을 알아주지 않았다. 피렌체의 광장이나 궁전에서보다 난 시골 외곽의 포도밭 언덕에서 더 가깝게 마키아벨리를 만난 느낌이다.
피렌체로 돌아와 보니 건물들이 죄다 나를 내려다보는 것만 같다. "우리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감히 상상하기 힘든 시간 이전부터 여기에 있었고, 네가 떠난 후에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웅장하고 견고한 석조 벽은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 위에서 수백 년 전 단테는 지옥의 문을 열었고, 마키아벨리는 권력의 얼굴을 폭로했다. 단테가 신의 질서를 노래했다면,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욕망을 꿰뚫었다.
하지만 피렌체는 이 두 사람을 쫓아내 버렸으니 역사의 걸출한 천재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조밀하고, 너무 오만한 도시였을지도 모르겠다.
단테와 마키아벨리, 그들이 지금 시대에 태어나 유튜브나 팟캐스트를 했다면 분명 대박이 났을 테다. 단테는 ‘지옥리뷰 채널’을, 마키아벨리는 ‘정치 생존 기술’ 시리즈를 운영했겠지. 구독자 수는 단연 백만 아니 천만 단위였을 거고.
피렌체는 문학만이 아니라 예술로 세상을 빨아들인다. 일단 가장 강력한 함정은 우피치 미술관이다. 가볍게 둘러볼 요량으로 들어갔다가는 어마낫 이건 다빈치네, 잠깐 이거 보티첼리잖아! 하면서 세 시간 뒤에 탈진 상태로 나오게 된다.
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발을 딛고 있는 곳이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르네상스 그 자체임을 깨달았는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앞에서는 미술 문외한이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다빈치의 초기작 앞에서 인간 얼굴에 담긴 심연을 가늠하게 된다.
미켈란젤로, 치마부에, 조토, 그리고 라파엘로까지— 전시관 순서를 잘못 잡으면, 라파엘로를 보기도 전에 체력이 다해서 미술관 바닥에 주저앉게 될 것이다. 이러니 피렌체에서 예술가의 이름이 곧 거리 이름이고, 그림 하나가 피렌체라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피렌체를 떠나는 날 아침 나는 베키오 다리 위에서 아르노강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터인데 무심한 듯 흐른다. 단테가 처음 베아트리체를 보았던 날,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필사본을 남몰래 숨겼던 순간도 이 강물은 조용히 지나쳐갔을 것이다.
여행의 마지막은 도시 중앙에서 ‘내가 바로 르네상스다’ 하고 말하고 있는 대성당이다. 정확히는 돔이다. 브루넬레스키가 혼자 머릿속에서 계산해 만든 거대한 기념비이자, 당시 피렌체 시민들에게 ‘우리는 로마보다 똑똑하다’는 확신을 안겨준 결정체다.
사람들은 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모두 고개를 꺾는데, 그래서인지 이 도시의 가장 흔한 자세는 목 디스크 초기 증세처럼 보인다. 목디스크 자세를 벗어나려 두오모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단테가 유년 시절을 보냈을 골목, 마키아벨리가 바삐 걷던 회랑, 그리고 수많은 이름 없는 예술가들이 삶과 예술을 버무렸던 깊고 짙은 향기의 피렌체. 거리의 돌바닥, 창틀, 벽 한 장 한 장이 나를 격동하는데 대체 이 도시를 어떻게 떠나야 한다는 말인가.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