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섭 더봄] 채만식 문학관을 찾아서 문학기행을 떠나다
[박종섭의 은퇴와 마주 서기] 문학기행으로 잊힌 소설을 찾고 멈춰 선 임피역 열차의 추억과 채만식 문학의 세계를 만나고 기억하고 추억해줘야 문화강국
옛날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잠깐 보았던 소설가 채만식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며 잊혔던 소설가 채만식이 보고 싶어졌다. 문학기행이 아니었으면 서울서 군산까지 먼 길을 일부러 찾아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른 아침 7시 30분, 압구정역에서 문학저널 회원들이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중간에 있는 청주에 들러 문학저널 지부 회원들을 태우고 군산을 향에 달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넓은 들판에 푸르게 자라는 청보리가 마냥 정겹다.
노고지리는 높이 떠 지저귀고 나른한 봄볕이 내리쬐는 담벼락에 기대어 고양이는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어릴 때 추억이 아련히 떠오르며 고향 친구들 모습도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여행은 이래서 즐겁다.
1972년 통학열차에서 만난 학창시절의 추억
아침도 먹지 못하고 일찍 나온 회원들을 위해 주최 측에서 준비한 김밥이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백설기와 간식거리가 한 봉지씩 주어졌다. 김밥도 맛있지만 갓 쪄내온 백설기가 말린 호박과 고소한 콩이 섞여 입맛을 북돋아 준다.
3시간을 달려 버스는 드디어 군산의 임피역에 도착했다. 한때 군산 시민들을 실어나르며 손발이 되어준 꼬마열차는 지금은 멈춰 서 있다. 저출산으로 인구도 줄어든 데다 자가용이 집마다 있으니, 열차를 타는 사람들도 적어진 게 큰 이유일 것이다. 멈춰 선 기차 내부는 그동안의 역사와 사진을 실어 전시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중에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1972년 통학 열차 모습이다. 꼬마열차에 미어터지도록 학생들이 올라타 있다. 그것도 모자라 기차 어느 곳이라도 붙잡을 수 있는 곳은 붙잡고 있는 모습이 마치 개미 떼처럼 보인다. 검은 교복에 학생모를 쓰고 있는 그들을 보며 먼 옛날 학창 시절 내 모습도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임피역 공원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과 막걸리 한 잔
기념물로 남은 임피역사 안에 노부부가 지팡이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차표를 끊으려 서 있는 조형물이 있다. 타지로 떠난 자식들을 만나러 준비한 보따리를 챙겨 열차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그렇게 기차역은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었다.
임피역 정원은 붉게 물든 연분홍과 봄꽃으로 잘 정돈되어 있고, 문학가의 고향을 알리듯 잔디밭에는 채만식의 단편소설 <논 이야기>에 나오는 한 장면이 조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주모가 호리병에 술을 내오고 두 명의 농부가 술상 앞에 마주 앉아 뭔가 대화를 나누는 형상이다.
포토존으로 되어 있어 나도 술상에 한자리 끼어 분위기를 잡았다. 군산 하면 채만식을 떠오르게 하니 문학의 힘은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채만식 문학관에서 소설가 채만식을 다시 만나고
임피역에서 놀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어 콩틀 두부 요리집에서 생두부와 해물탕이 나오는 바다 밥상 요리로 점심을 즐겼다. 한 상 가득 푸짐하게 나오는 전라도의 인심과 맛이 느껴졌다. 문학기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맛있는 향토 음식을 즐기는 것이다. 점심을 잘 먹고 곧바로 채만식 문학관으로 이동했다. 넓은 정원에 뱃머리 모양의 회색 건물이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안으로 들어가니 백릉 채만식의 동상이 중앙에 설치되어 있고 둥글게 연대별로 작품과 생애, 업적이 적혀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작품 <탁류>와 <태평천하> 등 누렇게 바랜 책 원본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외에 많은 작품과 집필 모습이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 동료에게 부탁했던 원고지에 대한 사연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원고지도 풍족하게 써보지 못해 죽기 전 동료에게 원고지 좀 실컷 쌓아놓고 써보게 원고지 20권만 구해 달라 했다고 한다. 그가 집필하던 책상 옆에 그가 그렇게 원하던 원고지 20권이 놓여 있었다.
장·단편 소설만 200편, 다작의 작가
채만식은 다작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장·단편 소설만 해도 200편에 이르며, 동화나 수필 등 다양한 장르까지 포함하면 생전에 1천여 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한다. 전시장에는 연대별로 발표한 작품이 빼곡히 적힌 표지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채만식이 활동하던 시기는 주로 식민지 시대였다. 1930년대 식민지 사회에서 해방 이후까지로 그는 일제 치하의 비인간적 처사와 부당한 침해, 가혹한 검열에 적절히 대응하며 미학적 성과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풍부한 어휘, 풍자, 반어, 역설, 새로운 구성 방식 등 다양한 표현 방식을 사용하며 저술 활동을 했다.
그렇지만 가난과 오랜 일제의 부당한 압박에 일부 친일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학사에서 그를 평가하는 이유는 당시 여러 명이 친일 활동을 하며 작품을 써왔지만, 해방 후 친일 활동에 대해 진심 어린 반성을 한 것은 채만식이 처음이라 한다.
그는 해방 후 <백민>에 게재된 단편 ‘민족의 죄인’에서 일제강점기하의 어려운 가계 때문에 일제가 주최한 강연회 등에 참석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를 ‘민족의 죄인’이라고 반성하였다. 그는 조선일보사, 동아일보사, 개벽사 등의 기자 활동을 했으나 1936년 이후는 직장을 가지지 않고 창작활동만 했다. 1945년 임피로 낙향했다가 다음 해 이리로 옮게 1950년 그곳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당시 나이 48세였다.
진포해양테마공원을 둘러보고 행복했던 하루
채만식 문학관을 나와 우리는 진포해양테마공원에 들러 군산앞바다를 둘러보았다. 공원에는 전차와 비행기 등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수명을 다한 군함도 관광객들을 위해 내부를 공개하고 있었다. 최무선이 화약을 발명하여 화포를 쏘아 일본 함선 침몰시켰다는 기록도 살펴 보았다.
관람을 마치고 공원 휴식 장소에서 준비해 온 홍어 무침에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누고 늦지 않게 서울로 출발했다. 오는 버스 안에서 오늘 찍은 사진에 5줄 내외 사진 해설 시를 쓰는 디카시 응모전을 하면서 서울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도 채만식 문학기행을 하고 휴식을 취하면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이참에 채만식이 쓴 소설을 다시 한번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성경제신문 박종섭 은퇴생활 칼럼니스트 jsp107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