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철의 무대리뷰] 죽음과 구원의 경계에서 춤춘, 유니버설 발레단 '지젤'
클래식 발레의 상징, ‘월하(月下)의 처녀귀신’들의 군무(발레블랑) 지젤 역 발레리나 전여진의 연기가 돋보여
1841년 파리 오페라에서 초연된 발레 <지젤>은 낭만주의 발레의 진수로, 여전히 클래식 발레의 대표작이다. 사랑과 배신, 죽음과 구원의 서사를 가진 이 작품은 무용수에게는 테크닉과 감정 표현이라는 이중의 시험대이며, 관객에게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감동을 선사하는 예술이다. 유니버설 발레단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올린 이번 <지젤>은 고전적인 해석 위에 섬세한 조율과 세련된 군무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문훈숙 단장의 자상한 해설과 함께 막이 열리고, 농민들의 활기찬 춤과 마을 사람들의 군무는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며 풍부한 무대감을 연출했다. 지젤의 바리에시옹(variation)이 차분히 이어졌으며, 특히 사랑이 배신당했음을 깨달은 뒤 펼쳐진 매드신에서는 과장 없이 심리의 파열을 탁월하게 보여주었다. 충격과 절망으로 쓰러지는 순간까지 감정선을 끌어올리며 관객의 심장을 천천히 조였다. 음악과 조명의 흐름 또한 이 과정에 정교하게 맞물렸다.
그러나 <지젤>이 진정한 정점에 이르는 순간은 단연 2막의 이른바 발레 블랑(Ballet blanc)이다. 흰 튀튀를 입은 윌리들이 초현실적 분위기 속에서 등장하며, 죽음과 삶의 경계가 흐려지는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무대를 푸른 안개처럼 감싸는 조명 아래, 윌리들의 군무는 극도의 절제 속에서 환상적인 일체감을 이뤘다. 일정한 높이와 긴장감을 유지한 채 펼쳐지는 춤사위 하나하나가 시처럼 느껴졌다. 십자가 비석이 180도로 휙 돌고 연기가 자욱해지면서 윌리가 된 지젤이 등장하는 연출도 눈에 띄었다.
지젤은 살아있는 몸과 죽은 영혼 사이의 경계에서 흔들림 없이 무대를 장악했다. 특히 알브레히트와의 2인무에서 손끝의 여운과 중심을 잃지 않은 느린 춤을 통해, 단순한 테크닉을 넘어선 감정의 흔적을 전했다. 관객을 향해 직접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감정을 ‘전달’하는 힘이 돋보였다. 지젤 역의 전여진은 과거 인터뷰에서 “춤과 음악이 하나 되는 순간이 진짜 행복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듯 그녀의 춤은 음악 위에 자연스럽게 올라타서 물 흐르듯이 지젤의 섬세한 내면을 연기로 표현했다.
알브레히트 역의 디아츠코프 역시 섬세한 감정선과 정확한 파트너링으로 지젤과의 서사를 촘촘히 완성했다. 특히 2막에서 지젤을 향해 손을 뻗는 장면은 후회와 사랑이 절절히 담긴 시선으로 관객의 마음을 울렸다. 한경아르떼필하모닉(지휘 지중배) 연주 또한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따라가며 무대의 감정을 풍성히 채웠다.
새벽이 밝아오고 윌리들이 사라지며 무대에 남는 건 한 줄기 안개뿐이다. <지젤>의 마지막은 그래서 눈부시지 않다. 하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강한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이 작품이 단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끝내 용서를 선택한 영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