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주 더봄] 3월, 남대문 꽃시장 그리고 프리지어

[권혁주의 Good Buy]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 라는 꽃말을 가진 프리지어 꽃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행위'일지도

2025-04-23     권혁주 쇼호스트
3월의 프리지어 /권혁주

남대문 꽃시장에 들렀다. 정오의 꽃시장은 적당히 분주하다. 길게 늘어선 꽃가게 사이로 형형색색의 꽃들이 도열하듯 서 있다. 점심 먹는 아저씨, 꽃을 손질하는 아주머니, 신문지에 싸인 꽃다발 한 아름을 안고 지나는 여자, 그 사이로 한 손엔 스마트폰을 든 채 ‘어떤 꽃을 살지 고민하는’ 내가 있다. 그렇다 나는 꽃을 사러 왔다.

꽃을 사는 이유는, 서점에 꽃을 두기 위해서다. 꽃 하나로 실내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매주 꽃을 사는 게 대단히 성실하다고, 귀찮지 않냐고 하지만, 글쎄. 오히려 남대문 시장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를 벗 삼아 망중한을 즐기는 기분이라 갈 때마다 흥겹기만 하다. 꽃시장도 꽃시장이지만 남대문 시장의 ‘살아 있는’ 느낌도 좋다.

게다가 꽃시장에서 꽃을 사면 싸다. 꽃가게에서 꽃 한 다발 사려면 3만원 이상 쓸 각오를 해야 하지만, 꽃시장에서는 그에 절반 가격으로 만족할 만한 다발을 얻어갈 수 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동네 꽃집보다 굳이 발품 팔아 시장 꽃시장을 찾는 ‘분명한’ 이유다.

책과 함께 놓인 프리지어 / 권혁주

3월이다. 때에 걸맞은 꽃을 사려고 꽃시장에 왔다. 꽃만큼 계절을 가까이서 느끼는 것도 없다. 계절 꽃을 미리 검색하고 갈 필요는 없다. 어차피 꽃시장에 늘여진 꽃들이 모두 제철 꽃이다. 지나는 겨울과 다가올 봄의 사이에서 나의 선택은 ‘프리지어’다. 프리지어의 꽃말을 찾아보니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였다. 3월과 잘 어울리는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리지어를 사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시장을 걸었다. 이어폰을 꽂지도 않은 귀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느 작은 우체국 앞 계단에 앉아, 프리지어 꽃향기를 내게 안겨줄 그런 연인을 만나봤으면~ 아아아아~’ (마로니에, '칵테일 사랑')

늘어선 꽃가게마다 같은 프리지어가 꽂혀 있지만 가격 비교는 필수다. 프리지어를 다섯 단 단위로 팔고 있었는데 집집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대개 7000~10000원 선이었다. 아마도 개화 정도에 따라 조금씩 가격 차이가 나는 듯했다. 지금 사서 당장 예쁘기보다는 일주일을 버텨가며 개화를 기다리는 쪽인 나는 굳이 만개한 프리지어를 살 이유가 없었다.

지금은 꽃망울이 굳게 닫힌, 그러나 내일모레가 기대되는 프리지어를 열 단 샀다. 1만5000원을 지불했다. 신문지로 퉁명스럽게 감싼, 가슴에 한아름 프리지어를 안고 남대문 시장을 나갔다. 문득 꽃시장을 걷는 나를 인지했다. 나는 어쩌다 꽃을 사는 사람이 되었을까.

서점에 놓인 프리지어 한 다발 /권혁주

꽃을 산다는 건, 어쩌면 아주 작고 조용한 반란이다. 효율(效率)과 유용(有用)이 지배하는 일상은 너무 많은 것들을 계산하게 한다. 그런데 꽃을 살 때만큼은 그런 계산이 조금 흐릿해짐을 느낀다. 프리지어의 향이 마음에 들면, 색이 맘에 들면, 꽃말이 맘에 들면, 혹은 프리지어에서 계절이 보이면, 그것으로 살 이유는 충분하다.

그렇게 얻은 프리지어가 서점 어느 조용한 화병에 자리를 잡는다. 서점에 방문한 손님이 책을 고르고 책을 계산한다. 책방지기인 나는 화선지로 책을 포장해 주고 그 위에 프리지어 한 송이를 잘라 붙여준다. 그 순간, 모든 손님의 말은 다음과 같다. “어머 꽃도 주시는 거예요?” 그 행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가 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했다. 그러면서 인간다움은 오히려 가장 쓸모없는 ‘행위’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비약일까? 꽃을 산다는 게 ‘행위’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꽃은 (언젠가) 시들지만, 꽃과 함께했던 이야기는 오래 남는다. 그러니까 꽃을 사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일'인 것이다. 

3월에 산 프리지어는 오래 가지 않았다. 화병의 물을 매일 갈아주고 젖은 밑단을 꽃가위로 새로 잘라주었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꽃잎이 쭈글쭈글해졌다. 떠날 때를 알아서 아련하고 간절했던 시간들. 3월의 프리지어는 그렇게 한낱 물건이기 이전에 나에게 이야기였다.

여성경제신문 권혁주 쇼호스트 kwonhj100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