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아은의 편한숏] 이길 수 없는 '승부'가 있었다···'버닝'의 질문들

세계는 과연 설명될 수 있는가? 인과를 알면 납득할 수 있는가?

2025-04-20     허아은 기자

21세기 현대인은 매일 수많은 콘텐츠를 스쳐 지나간다. 그중 어떤 장면은 뜻밖에 발길을 붙잡고, 짧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다. ‘편한숏’은 그 순간에 주목한다. 한 ‘편’의 이야기 속에서 ‘한’ 개의 유의미한 ‘숏(shot)’을 골라 그 장면이 품은 감정과 맥락을 읽어낸다. 영화, 드라마, OTT 등 서사가 있는 영상 콘텐츠를 바탕으로 화면 속 짧은 순간을 통해 지금 이 시대와 우리가 마주한 질문들을 함께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종수의 집은 경기도 파주의 쇠락한 농촌에 있다. 대남 선전 방송이 들릴 정도로 북한과 밀접하다. 새벽이면 안개가 자욱이 끼고 하늘에는 철새가 떼 지어 날아간다. /네이버 영화

한 숏

영화 <버닝(Burning), 2018)> 러닝타임 중반쯤, 종수 클로즈업. 종수는 남의 집 앞에서 해미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는다. 말소리는 없고 불안한 상황인 듯한 잡음만 흐르다 이내 끊긴다. 종수는 멍하니 바라본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한 듯 어리둥절함과 절망이 동시에 그 얼굴 위를 스친다. 그리고 슬며시, 알아차리지 못하게 화면의 초점은 종수에서 그 뒤의 배경으로 전환된다. 종수를 타이트하게 잡으면서도 초점은 말라붙은 나뭇가지와 아무렇게나 달린 나뭇잎, 낡은 양옥집에 가 있다. 피사체는 흐릿하고 배경은 또렷하다. 약 40초간 이어지는 이 숏에서 이러한 시각적 전도는 종수의 내면과 그가 놓인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자는 사라졌고 그녀의 실종과 관련 있어 보이는 남자는 태연하다. 심증은 분명한데 아무에게도 그것을 묻거나 말할 수 없는 인물이 화면 한가운데에서 초점을 잃는다. 초점이 맞지 않게 된 종수가 화면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무성한 잔가지와 바싹 마른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리고만 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유통회사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던 소설가 지망생 종수(유아인 분)가 오랜만에 재회한 어린 시절 친구 해미(전종서 분)와 그녀가 아프리카 여행 이후 가깝게 지내는 남자 벤(스티븐 연 분)과 얽히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벤이 이상한 취미를 고백한 뒤 해미는 실종되고 종수는 그녀의 흔적을 쫓는 동시에 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해미의 실종에 대한 명확한 증거나 설명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종수는 벤을 살해하고 불태운다.

그 씬

종수가 이 전화를 받은 것은 집 근처의 비닐하우스가 무사한지 확인하러 다니던 도중이다. 벤은 직전 "너의 집 근처에 있는 비닐하우스 중 하나를 태우겠다"고 선언했다. 벤에게는 아무도 모르게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

이 숏에서 종수는 해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음을 느낀다. 이내 벤에게 해미의 신변을 묻지만 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말만을 하며 슬퍼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종수는 벤이 해미의 실종과 연관됐다고 확신하고 그를 관찰한다.

얼마 뒤 벤은 종수에게 소설은 잘 되고 있냐고 묻는다. 벤은 종수의 '소설 씀'에 흥미를 느끼는지 작품에 관해 자주 묻는다. 종수는 못 쓰고 있다며 "저한텐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자 벤은 웃으며 답한다. "종수씨는 너무 진지한 것 같아요. 진지하면 재미없어요."

이 편

<버닝>은 표면상 실종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종수가 정말로 찾아다니는 것은 '인과관계'다. 그럼에도, 의심스러운 벤에게는 '해미를 어쨌냐'고 직접 묻지는 못한다. 이렇듯 물어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지점은 따라서 설명되지 않고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채 벤의 대사와 같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버닝>은 제71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 국제비평가연맹(FIPRESCI)상을 수상했다. 오스카 외국어영화상의 1차 후보(shortlist)에도 국내 영화 중 최초로 이름을 올렸다. /네이버 영화

종수는 아직 설명되지 않은 틈을 메우고 기록하려는 사람이다. 소설가를 지망한다는 설정,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라는 대사는 그가 세계를 의미로 구성하려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현실의 인간은 인과를 몰라도 살아지지만 소설에서 이유 없이 행동하는 인물은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소설은 현실을 닮은 듯하지만 작동 방식은 오히려 정반대다. 이야기로 기능하려면 원인과 결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현실을 담는 듯하면서도 완전히 '비현실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수는 세상과 마찰을 빚는다. 그가 아버지의 선처를 위해 탄원서를 쓰고 마을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장면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종수가 쓴 탄원서를 받아 든 이장은 "글을 참 잘 썼다"고 칭찬하면서도 종수가 아버지를 '정다운 농부'라고 설명한 부분을 두고 "그렇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탄원서에 서명을 해준다.

이 지점에서 종수의 시도-아버지를 유리하게 설명하려 함-은 실패하는 게 아니라 무의미해진다. 종수의 방식이라면 설명이 틀렸을 경우 탄원서에 서명하지 않아야 맞다. 설명의 맞고 틀림은 이장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승부(2025)>에서 이창호(유아인 분)가 스승을 상대로 두뇌 싸움을 펼친다면 <버닝>에서 종수가 마주한 싸움에는 명확한 룰과 승패가 없다.

종수와 벤, 두 남자의 비접촉, 비물리적 대립은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긴장선이다. 대부분의 스토리가 종수의 시선에서 전개되며 종수는 벤의 가치관에 오염될 기미가 전혀 없다. 벤 또한 종수의 논리나 세계관에 '흥미'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 벤은 주인공의 변화를 위한 '갈등 유발자'로 기능하는 단계를 훌쩍 넘어선다. 엔딩 전까지 이들은 끝까지 교차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의식하는 평행선처럼 병렬해 있다.

벤은 종수의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다. 그는 해미가 슬퍼 울자 "신기하다"며 자신은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고 따라서 슬펐던 적도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연적이 될 수도 있는) 종수가 "해미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도 웃기만 한다. 그가 해미를 만나는 이유는 '흥미롭기 때문'이다. 나부끼듯 살던 종수가 해미와 벤을 만나고 집요해지는 것과 달리 벤은 최후까지 무심하게 떠다닌다.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울 때 "가슴에서 베이스가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종수에게도 "베이스를 느껴보라"고 권유한다. 이 영화의 메인 사운드트랙 'Burning'에서는 유독 베이스라인이 강조되고 있다. 베이스 기타를 비롯해 아프리카 전통 악기가 사용됐다. 낯선 무언가가 점점 다가오는 듯한 이 사운드트랙은 여러 차례 변주되며 종수의 원숏에 깔린다.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며' 얻는 베이스가 종수가 불안감을 느끼는 장면에서 흐른다는 점에서 그의 쾌감은 누군가의 실존이 지워지는 순간과 묘하게 겹쳐 있다.

종수가 해미를 만나면서부터 작품은 시작된다. 종수는 해미를 납득했다. 쇠락한 농촌에서 자라 번듯한 직장을 갖기 어려웠고, 그래서 내레이터 알바로 생계를 이어갔고, 그러므로 후암동의 낡은 빌라에 세 들어 사는 그녀의 삶은 종수가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흐름이었다. 팬터마임을 배우고 아프리카 여행을 꿈꾸는 해미의 방식은 종수의 시선에서 ‘이해 가능한 추구’였다. 인과를 외면하는 세계에서 해미는 종수가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조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종수가 해미를 사랑한 것은 필연에 가깝다. 그런 해미가 사라졌을 때 종수는 해미를 찾는다기보다는 해미가 '왜' 사라졌는가를 알아내고자 한다. 이 세계가 끝내 '설명될 수 있는가'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것은 종수에게 꼭 필요한 행위였다.

해미는 단순히 외롭거나 가난한 인물이 아니며 종수와 마찬가지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차이점이 있었다면 종수에게는 펜이라는 무기가 있었고 해미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해미가 실종되고 종수는 그렇지 않은 상태로도 이어진다. 해미는 가장 강렬하게 존재했지만 그 누구보다 쉽게 지워진다.

해미가 실존한다는 사실은 육신으로 드러난다. 해미가 얼마나 물리적이고 실존적인 캐릭터인가 하면, 벤이 해미에게 '마음에 돌이 있다'고 한 뒤 조경용 자갈을 집어와 '그 돌 빼냈다'며 보여주는 장면도 있다. 장난처럼 흘러가지만 이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웃고 넘길 수만은 없다.

해미는 실존하지 않는 귤을 까먹는 팬터마임 연기를 보여주며 "달고 맛있다"고 말한다. 삶의 의미를 구하는 사람,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 위해 경제적 여유가 없음에도 아프리카 여행을 떠난다. /네이버 영화

종수는 이 같은 실존성에 끌린다. 그가 해미의 방에서 수음하는 장면은 여러 차례 반복되며 해미가 실종된 이후에는 그녀가 옆에 있는 듯한 상상을 곁들이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던 부분'의 감각을 몸 안에서 되살리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작 후반부, 종수는 해미의 방에서 소설 집필을 시작한다. 수수께끼 같아서 글을 못 쓰겠다고 했던 인물이 드디어 문장을 쓴다. 그건 수수께끼가 풀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수수께끼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일까.

질문의 답은 마지막 신에서 얻을 수 있다. 종수는 '사라진 해미를 찾았다'며 벤을 불러내고 그를 죽인 뒤 불을 지른다. 중요한 것은 종수가 입고 있던 옷도 전부 벗어 벤과 함께 태운다는 것이다. 방화의 순간 종수는 해미의 실존 방식-육신으로 불 앞에 선다. 그 행위는 종수가 해미에게서 배운 태도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그냥 두라'고 하는 존재를 처리하는 동시에, 어릴 적 어머니 옷을 태웠던 기억처럼 '잊어야만 하는 것'을 사라지게 하는 방식이다.

두 남자는 태우는 행위에 관해서도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대마초를 나눠 피운 저녁, 종수는 벤에게 자신이 어릴 때 집을 나간 엄마의 옷을 태웠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종수의 태우는 행위는 아버지에 의해 강제된 '잊어야 함'을 위한 행위였다. 종수의 이야기에 대해 벤은 별다른 호응 없이 쓰임새를 잃은 비닐하우스를 불로 태우는 행위가 자신의 '취미'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 비닐하우스가 쓰임새를 잃었는지는 본인이 판단하는 거냐고 종수가 묻자 벤은 답한다. "난 판단하지 않아요. 그냥 그것들이 태워지길 기다린다고 느낄 뿐."

종수에게 태우기는 억지로 망각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벤에게는 판단 없이 처리하는 기계적 행위이자 유희 추구의 성격까지 묻어나는 취미다. 여기서 벤은 선악도 의미도 없는 초월적 존재로서 '신'의 이미지와 겹친다. 강력하지만 도덕적이지 않은 신에게 인간은 기대하지 못하고 두려움만을 느낀다.

다만 그럼에도 비극은 아니다. 작품의 마지막, 종수가 모는 포터 트럭 앞 유리에 수분이 많은 눈이 쌓여 시야가 흐려진다. 종수는 이내 와이퍼를 작동시킨다. 창이 닦여 그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게 된 다음에야 화면은 페이드아웃 된다. 세상이 여전히 흐릿하더라도 종수는 그것을 바라보고, 닦아내고, 앞으로 나아간다.

<버닝>은 결국 묻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끝까지 설명하려 애쓴 자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버닝(Burning), 2018

감독 이창동
촬영 홍경표
음악 모그(Mowg)
보는 곳 넷플릭스 왓챠 티빙

* 종수를 연기한 배우 유아인의 '어딘가 모르게 억울해 보이는' 연기가 좋았다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2007)>
* '정확히 말을 안 함'의 답답함이 어쩐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면, <파수꾼(2010)>

[편한숏]은 기자 개인의 감상과 해석을 담은 칼럼 코너입니다.

여성경제신문 허아은 기자 ahgentum@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