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56년 만에 스웨덴서 돌아온 편지···"그 한국 학생이 접니다"

할머니 유품 발견돼 세계로 알려져 부산서 국제후원 받고 교사로 성장 이제는 은퇴해 동남아 지원을 실천

2025-04-11     이상무 기자
부산시 사하구 괴정동에서 공삼현 장로가 여성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상무 기자

1969년 여름, 머나먼 이국땅에서 보내온 4400원은 가난한 나라 한국 소년의 학비에 큰 보탬이 됐다. 10살 소년은 곧 스웨덴 후원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감사의 뜻과 함께 꼭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았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꿈을 이뤘고 한국은 부강한 나라로 성장했다. 부산에 거주하는 공삼현(66세) 성민교회 장로의 이야기다.

스웨덴의 한 청년은 지난해 8월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을 발견했다. 한국어로 된 낡은 편지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 인터넷에 올렸다. 후원에 대한 감사 편지라는 번역이 댓글에 달렸고 이 소식은 국내에 전해져 이달 초 화제가 됐다. 많은 이들은 어린 학생이 또박또박 쓴 글씨를 보고 당시 개발도상국 한국의 처지를 떠올렸다. 또한 스웨덴 여성이 50여 년간 편지를 간직했다는 놀라운 사실은 '인류애'라는 보편적 정서를 가슴 속에서 울리게 했다.

흙수저였던 편지의 주인공은 1969년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 공부를 '단디'해 부산 사하에서 알아주는 선생님이 됐다. 고등학교,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교감까지 역임했고 현재는 교회 장로로서 교역과 봉사를 하고 있다. 9일 부산 성민교회에서 만난 공삼현 장로는 편안하고 건강해 보였다. 

"그 편지가 기억 속에서 사라졌는데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살고 있다가 알게 돼서 저도 참 감동이 오더라고요. 목이 메입니다. 어릴 때 그 어려웠던 순간들과 또 그분들의 도움이 저한테 너무 큰 기쁨이었다는 생각을 했죠. 며칠 전 교회 사람한테 그 소식을 들었는데 처음엔 '모른다'고 했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맞겠다 싶어서 확인해 보니 제 편지가 진짜 인터넷에 올라왔더라고요."

그가 어렸을 적 받은 후원은 국제구호개발 비영리단체 ‘양친회(養親會)’의 사업이었다. 6·25전쟁을 계기로 1953년 3월 임시 수도인 부산광역시에 양친회 한국지부가 설립됐다. 현재도 양친회는 '플랜코리아'로 이름을 변경해 전 세계에 걸쳐 복지 사업을 하고 있다. 부산 토박이인 공삼현 장로가 양친회를 접한 것은 행운이자 기회였다. 

"당시는 워낙 먹고 살기가 어려워 보릿고개를 겪었죠. 국민학교 저학년 때부터 부산에 있는 '영국 병원'이라는 곳에 가면 밥을 준다는 소문이 있어서 갔습니다. 12시가 되면 한 끼를 배급해 줘서 꽤 먼 거리인데도 친구들과 가서 먹고 그랬어요. 가루우유도 타 먹었죠. 크리스마스가 되면 선물 꾸러미를 주는데 처음 보는 과자와 구슬이 있더라고요.

옛날에 그만한 규모를 갖고 있는 병원은 부산에 없었습니다. 어릴 때 영양실조가 있으니까 부스럼 같은 걸 앓았는데 거기 가면 코쟁이 의사 선생님이 파란색 잉크 약을 발라줘서 치료받았어요. 얼굴에도 발라서 시퍼렇게 다녔던 기억도 있네요. 그러다 병원 분들하고 친해져가지고 양친회와 연이 닿았습니다. '누가 너를 도와주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저희 부모님이 들어서 맺어졌습니다." 

ㅡ스웨덴 양친과 어떤 것을 주고 받았나요

"편지는 받은 건 없지만 그랬다면 그게 영어나 스웨덴어로 돼 있으니까 읽을 줄 모르는 저한테는 직접 안 준 것 같아요. 단체에서 받았을 수 있죠. 학용품 같은 것들은 저한테 전달했는데 나머지는 있었는지, 중간에서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그땐 세계 지도가 없어서 스웨덴이 어디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는데 '먼 나라에서 온 소중한 물건이다' 해서 애들한테 자랑도 했습니다.

고급진 스케치북, 크레파스 등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스케이트를 받아 겨울에 언 강을 타는 모습을 사진 찍어 스웨덴 부부께 보내드린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도 쓴 기억이 있고요. 그때 신평초등학교 동창으로 만난 아내와는 결혼해 평생을 함께하는 사이입니다."

공삼현 장로의 어릴 적과 단란한 가정을 이룬 시절 /사연자 제공

ㅡ그 당시 4400원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0만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어떤 느낌이었나요

"큰 돈이었고 그걸로 교복과 학용품을 샀죠. 부모님이 저한테 기대가 있었으니까 놀지 않고 공부해서 전교에서 1~2등 정도 하다가 중학교도 높은 성적으로 갔습니다. 양친회에서는 공부를 잘하고 가능성 있어 보이는 아이한테 투자한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하죠.

다른 친구 몇 명도 아마 양친회 지원을 받았을 거예요. 표시를 안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요. 이 도움받는다는 게 사실 좀 부끄럽고 좀 미안한 일이라서 전 알리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정 형편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어요.

중학교 졸업할 때도 전교에서 손가락 안에 들 성적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인문계 대신 실업계를 가는 게 안 좋겠냐'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부산 상고로 진학했습니다. 거기 나오면 은행 취업이 잘됐는데 전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해 그나마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인 부산 사범대로 갔습니다.

1980년대에 전산 붐이 일어나서 마침 제가 상고 출신이니까 그걸 배우고 대학원까지 나와 전산, 컴퓨터, 진로지도 과목 교사를 쭉 했습니다. 교직이 힘들지만, 저에게 적성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표창도 많이 받고 주위 분들한테 신뢰를 얻었습니다."

공삼현 장로는 후원을 받은 덕분에 인생을 허투루 살지 않기로 다짐했다고 밝혔다. 그는 멀리서 온 기자에게도 아낌없는 정을 베풀었다. /이상무 기자

ㅡ살면서 어릴 때 후원받은 일이 종종 생각 나던가요

"그렇습니다. 그분들의 그런 고마움도 제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도와주셨던 분들이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고 느껴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한테 잘해줘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집사님 하에 같이 교회 일을 섬기기도 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어렵게 사는 소년, 소녀에게 월 3만원씩 보내주는 것도 있고 선교사님한테 지원하고 그동안 매달 소득의 10분의 1 이상은 썼습니다. 이젠 정년 은퇴를 해서 집사람이 노후 걱정을 하기도 했죠.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잘 살게 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ㅡ세월이 흘러 이제는 다른 나라에 후원을 하는 입장이 된 소감이 있나요

"저는 그냥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 받은 게 하나님의 뜻이고 주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그렇게 해야 되겠다는 거죠. 인생의 풍랑을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믿음으로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생생하게 살다가 오늘 밤에 어떻게 될지,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건데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겁니다. 

과거를 발판 삼아서 현재를 사는데 그동안 제가 삶에서 무엇을 하고 살았나 되돌아보면 사실 보잘것 없어요. 그렇지만 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어서 나를 살려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동안 보람인 것은 수많은 제자가 성장한 모습을 보는 겁니다. 그리고 이젠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성민교회 장로님이구나' 하고 인사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여성경제신문 이상무 기자 sewoen@seoulmedia.co.kr

​스웨덴에서 발견된 56년 전의 편지가 최근 화제에 올랐다. /온라인 커뮤니티
1969년을 배경으로 감사 편지를 쓰는 한국 소년과 편지를 받아본 스웨덴 여성의 모습 /챗G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