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비아레조의 숙소 이야기 - 호사다마와 전화위복 사이

[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어쩌다 한 달, 이탈리아 (10) 동양인은 숙소를 빌리려면 면접 행운과 불운 모두 총량의 법칙 최악을 경험한 후에 얻은 최고라니

2025-04-10     박재희 작가

지난 며칠간 지나치게 운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누군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 우연히 들어간 캠핑장이 그 지역 최고 뷰를 자랑하고, 비를 피해 급히 예약한 숙소가 영화에 나올 법한 산장이었다면, 뭔가 수상하다고 느끼는 게 정상이 아니었을까?

피사로 향하던 길, 이번에는 조금 평범한 동네에서 숙소를 찾기로 했다. 빨래도 쌓였고, 캠핑장 음식도 슬슬 질릴 즈음이었다. 마음 편한, 조용히 지낼 수 있는 숙소가 필요했다. 작전명은 ‘보통 사람의 보금자리’. 에어비앤비를 뒤적이다가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이제 막 시작한 비즈니스예요”라며 내놓은 숙소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관광지라고는 없는 곳이네. 그냥 평범한 주택가야.”

“그래, 딱 좋다. 검색해 봐도 15년 전 열차 사고 말고는 뉴스도 없어.”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루카도에 있는 도시, 비아레조(Viareggio) /게티이미지뱅크

최고의 자극이 모이면 최고로 좋은 여행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여행자는 안다. 너무 많은 아름다움은 어느 순간 피로가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계속 이어지는 절경, 명소, 감탄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뇌도 눈도 과부하 상태가 된다. 그날은 ‘별다르게 볼 것 없는 동네’라는 말에 묘하게 끌렸던 날이었다.

숙소로 향하던 길, 믿기 힘든 가격을 자랑하는 과일 가게를 발견했다. 사과가 1㎏에 0.99유로라니. 한국에서 사과 하나에 5000원이라는 전설적인 가격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이게 설령 백설 공주를 잠재우는 독 사과라 해도 무조건 사야 했다. 딸기, 토마토, 바나나, 사과, 오렌지, 체리, 석류까지. 과일 시장 올킬.

가게 주인장에게 "진열이 예술이에요!" 하고 칭찬했더니 그는 터키(튀르키예) 출신이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알게 된 사실 하나. 과일 가게는 터키나 아랍계 사람들이 운영하는 곳이 대체로 저렴하고 품질도 좋다. 여행도 학습의 연속이다.

장보기를 마쳤으니 남아있는 오늘의 미션은 빨래다. 집에 가서 요리도 하지 말고 과일이나 실컷 먹으며 밀린 빨래를 하자며 숙소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은 후 달렸다. 그런데···

여러 종류의 과일이 신선하고 저렴한 이탈리아 과일 가게 /게티이미지뱅크

“주소는 맞는데, 사진이랑 일치하는 집이 없는데?”

빙빙 돌다가 막다른 골목에 갇혔고 숙소 주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까운 시간이 계속 흘렀다. 줄기차게 전화하다가 드디어 연결. 목소리는 상냥한 남자였는데 믿기 힘든 말을 꺼냈다.
우리가 받은 주소는 실제 숙소가 아닌 주인의 집 주소란다. 게다가 이 남자, 자신은 숙소 주인의 통역사이자 조력자인데 주인께서 우리가 입실하기 전에 인터뷰가 필요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인터뷰라고? 숙소 예약하고 지불도 다 했건만 주인 면접을 봐야 하는 황당 신박한 콘셉트다. 여하튼 다니엘이라는 남자가 열쇠를 가진 아주머니와 곧 온다 하여 우리는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갔다. 후니는 복잡한 후진에 시달리고, 미 선배는 내비에 표시도 잘 안되는 골목을 찾아야 했고, 나는 뒷자리에서 온몸으로 과일 박스를 지탱해야 했다. 말하자면 밀수선의 과일 지킴이 모드라고 할까.

도착했다.

“여기가 맞아?”

후니가 드물게 큰 소리로 외쳤다. 마주한 집은(집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면) 철거를 기다리는 폐건물처럼 보였다. 차에서 내려 집 앞 발판을 딛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건 발판이 아니라 누군가 오래전 하수구 청소에 썼던 걸레의 환생이었다. 현관문은 열쇠가 필요 없을 정도로 삐걱거리며 열렸고 집 안 공기는… 글쎄, 수년간 방치된 사건 현장이 아직도 숨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난 여기서 못 자. 차라리 차박을 하고 말지.”

미 선배는 차분히 집기를 살폈고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점점 더 화가 났다. 살펴보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건 그냥 ‘숙소가 불편한 수준’이 아니라 사회 고발 다큐멘터리에 나올 법한 상황이었다. 이런 곳에 누군가를 재운다면 분명 SNS에 회자하면서 비난을 받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때 다니엘과 세모꼴의 눈을 가진 노파가 도착했다. 노파는 우리가 불법 체류자가 아닌지 의심했고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여권을 보여달래요···”라고 번역했다. 그 순간 내 입에서는 굉음을 동반한 말들이 쏟아졌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그렇게 빠르고 큰 소리로 항의한 적은 없었다.

“이 집, 청소는커녕··· 피난민도 여기선 안 자요! 당신 눈에는 안 보이나요? 지금 당장 조치하지 않으면 플랫폼에 공식 항의할 거예요! 게다가 당신이 무슨 권리로 심사를 하겠다는 거죠? 여기서 자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하지만 비용 지불을 마쳤는데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여권을 보자고요?”

노파의 표정은 슬퍼하기보다 우리가 계약을 깰 거라는 말에 안도하는 눈빛이었다. 우리에게도 잘된 일이지만 기가 막힌다. 이건 거의 ‘인종차별 숙소’였다.

“오, 정말 미안해요. 제가 다 사과드릴게요.”
다니엘은 거듭 사과했고 그의 말을 믿자면 이 집은 그의 어머니 지인인 노파가 처음 사업을 시작하면서 어머니 이름으로 올려놓은 숙소라고 했다. 노파도 다니엘도 실전은 처음이었던 거다.

“다니엘, 당신 잘못은 아니에요. 하지만 꼭 전해줘요. 피난민 쉼터도 이보다는 나아요. 그리고 그런 차별 언동으로는 고발당하거나 나쁜 일을 겪고 말 거라고요.”

다니엘의 잘생긴 얼굴이 아니었으면 조용히 끝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니엘은 너무 선량하고 잘생긴 청년이었고 심지어 그는 곧바로 우리에게 새로운 숙소를 찾아줬다. 젊은 신혼부부가 여행 중이라 내놓은 집이었고 세탁기, 건조기, 깨끗한 침구, 자동 번호 키까지 완벽했다. 인터뷰도 없었고.

밤 9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과일을 씻어 먹으며 빨래를 돌릴 수 있었다. 후니는 과일로 혈당을 보충하며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여유를 되찾았는지 그 유령의 집 노파 얘기를 하면서도 웃었다. "아직도 아시아인은 불법체류자나 난민이라고 생각하는 할망구, 화도 나지만 좀 불쌍하기도 하네."

후니는 동정심을 느낀다지만 나의 화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에어비앤비 피드백에 논문 수준의 컴플레인과 피드백을 남기고서야 분이 풀렸다. 물론 해결사 다니엘의 칭찬과 감사도 빼지 않았다. 신혼부부의 가전은 모두 최신형이었다. 많은 빨래가 건조기에서 잘 말랐다. 호사다마라더니 결국 전화위복이었던 것이다.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비아레조의 카니발 /게티이미지뱅크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