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연의 편한숏] 계급 콤플렉스의 끝은 자아 종말···'추락' 다시 보기

꾸며낸 자아의 끝은 추락의 시작 인간을 5점 만점으로 환산하고 상위 계층 진입이 존재 기준이 된 미래가 아닌 지금 현실의 이야기

2025-04-10     박소연 기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미러 시즌 3 에피소드 '추락(Nosedive)' 

※ 이 글에는 에피소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필요한 폭력과 잔혹함을 ‘현실적 묘사’로 포장한 콘텐츠가 쏟아지면서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추락’은 피 한 방울 없이도 현실의 불편함을 드러내고 그 자각은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10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미러> 시즌7이 공개 예정인 가운데 과거 시즌의 에피소드 또한 다시 주목받고 있다. 현실을 비추는 날카로운 상상력으로 회자된 ‘추락 (Nosedive)’은 시즌3의 첫 에피소드로 추천작 목록에 빠지지 않는 회차 중 하나다.

주인공 레이시는 목표 평점 4.5를 달성해 고급 주택에 입주하려 한다. 이를 위해 라이프 코치에게 조언을 구하고 상위권 사용자와의 긍정적 교류를 전략적으로 설계한다. 상위 랭커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자기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작은 실수들이 연이어 누적되며 그의 평점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고 결국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른다.

레이시는 ‘소수를 위한 특별한 삶’이라는 고급 아파트 소개 문구 앞에서 기대에 찬 미소를 짓는다. 이 장면은 단순히 이상적인 거주지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상위 계층으로 편입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값비싼 메뉴나 공간을 배경 삼아 ‘나도 그 세계에 속해 있다’는 식의 자기 연출은 SNS에서 흔히 발견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위치를 소비하는 것이지 실제로 그곳에 속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연출이 정교해질수록 ‘그곳이 아님’은 더 선명해진다. 누구나 조금은 그런 연출을 해본 경험이 있기에 이 욕망은 낯설지 않다. 그 감정이 계속 쌓이면 언젠가 내가 속한 곳과 속하고 싶은 곳의 간극이 스스로를 지치게 만든다.

공항 씬은 그야말로 기괴하다. 공항에서 레이시는 처음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탑승을 거부당한 순간 화가 치밀어 욕설을 내뱉지만 곧바로 평점이 깎일까봐 억지로 웃으며 사과하길 반복한다. 주변 사람들은 말없이 지켜보며 점수를 깎는 것으로 조용히 응징한다. 결국 레이시는 다시 폭발하고 그 감정조차 또 다른 제재의 근거가 된다.

이 에피소드의 진짜 전환점은 레이시가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에 찾아온다. 이제 그녀는 점수를 위해 웃을 필요가 없고 누구에게 잘 보일 이유도 없다. 그 순간 처음으로 제대로 화를 내고 말다툼을 하고 자기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억눌러왔던 자아가 무너지고 비로소 타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가 가능해진다. 평점이 추락할수록 애써 감춰둔 자아의 민낯이 드러난다.

작품은 이 욕망을 개개인의 문제로 축소하지 않는다. 그 욕망을 유도하는 위계와 규칙에 개인이 자발적으로 편입되는 구조 자체를 드러낸다.

'추락'은 미래사회에 대한 경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 우리가 매일 조금씩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좋아 보이기 위해 웃고,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말을 고르고 다른 사람의 시선 속에서 나를 편집하다 보면 ‘살아 있는 나’보다 ‘잘 보이는 나’가 중요해지는 구조 속에서 자아는 점점 희미해진다. 공포영화보다 훨씬 현실적인 이야기다.

한편 이 에피소드에 사용된 막스 리히터(Max Richter)의 음악은 피아노와 현악 중심의 차분하고 따뜻한 선율로 구성돼 있다. 밝은 색감과 정돈된 화면, 등장인물들의 과장된 친절과 어우러지며 겉보기엔 안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긴장이 깔려 있다.

특히 점수가 떨어질 때마다 삽입되는 효과음은 그 따뜻한 정서에 불쑥 끼어들며 오히려 강한 불편함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이질적이지 않다. 차분한 음악과 예의 바른 사회적 포장이 만들어내는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리히터의 선율은 그 안에 숨겨진 위선을 조용히 드러내는 장치로서 작동한다.

추락(Nosedive)

연출: 조 라이트(Joe Wright)
원안: 찰리 브루커(Charlie Brooker)
출연: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Bryce Dallas Howard) 등

※ 이 글은 기자 개인의 해석과 감상을 담은 칼럼입니다.

여성경제신문 박소연 기자 syeon0213@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