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철의 무대리뷰] 서울의 봄을 빛낸 헨델의 첫 오라토리오 ‘시간과 깨달음의 승리’
르네 야콥스 B’Rock 오케스트라 지휘 정통 바로크 음악의 매력에 빠지다
예전에 학교에 입학하거나 직장에 들어갈 때 작성한 신상명세서에 ‘취미/특기’ 난이 있었고 대개는 ‘독서/음악감상’을 적곤 했다. 물론 그때의 음악감상은 ‘클래식’ 감상이었다. 우리에게 클래식은 주로 악기 연주곡인 소나타, 교향곡 등 ‘기악’을 뜻하는데 사실 클래식은 기악과 함께 인간의 몸이 악기인 칸타타와 오라토리오, 오페라 등 ‘성악’이라는 두 날개여야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오라토리오는 의상과 무대장치 등을 갖추지 않고 오케스트라와 함께 가수가 오로지 노래만으로 꾸미는 무대이며, 헨델의 <메시아>, 하이든의 <천지창조> 등이 대표작이다.
헨델이 1707년에 최초로 작곡한 오라토리오인 <시간과 깨달음의 승리>(Il Trionfo del Tempo e del Disinganno) 공연이 유명 지휘자 르네 야콥스의 지휘로 폭설이 휘날린 3월의 마지막 주말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다. 르네 야콥스는 카운터테너 출신의 고음악 지휘자로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이다. B’Rock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이 오라토리오는 덧없는 쾌락과 영원한 지혜 사이의 투쟁 이야기를 담은 후기 바로크 음악의 정수를 담고 있다.
이 작품에는 아름다움과 즐거움, 시간과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네 명이 등장하며 ‘아름다움(Bellezza)’이 ‘즐거움(Piacere)’을 뉘우치고 극복하여 ‘시간(Tempo)’과 ‘깨달음(Disinganno)’의 인도를 받아 내면의 성장을 이루는 과정을 노래한다. 섬세한 표현력으로 세계 무대를 누비는 소프라노 임선혜가 ‘아름다움(Bellezza)’을 맡아 헨델의 복잡한 질주를 여유롭고 다양하게 표현하며 열연을 펼쳤다.
정통 바로크 사운드로 유명한 B’Rock 오케스트라는 야콥스의 정밀하고 표현력 있는 지휘로 콘서트홀을 채웠다. 포지티브 오르간과 류트, 하프시코드 등 시대 악기의 따뜻한 울림과 현의 섬세한 표현으로 풍부하고 질감 있는 사운드가 연주되어 마치 초연된 18세기 로마로 이동한 듯한 느낌이었다. 서곡 소나타로 문을 연 1부는 물론 포지티브 오르간의 연주로 시작되는 2부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공연이었다.
임선혜와 함께 스토리를 이어간 소프라노 카테리나 카스페르, 카운터테너 폴 피기에, 테너 토머스 워커는 각자 풍성한 음악을 노래했다. '즐거움' 역의 카테리나 카스페르는 안정된 음정으로 자신의 역할에 매력과 카리스마를 불어넣었다. 특히 그녀의 연기는 세속적인 기쁨의 유혹을 구현하는 매혹적인 표현으로 가득 차 있어 인상적이었다.
'깨달음' 역의 폴 피기에는 공연 내내 안정적인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우리 무대에서 카운터테너의 소리는 자주 듣기 어려운데 깊고 울림이 있는 그의 목소리는 배역에 무게를 실어주며 방종에 대한 지혜를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한편, '시간' 역의 토마스 워커는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상기시키며 무게감 있게 대사를 전달했다.
‘Lascia la spina…’로 시작하는 이 작품의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가시는 두고 장미를 꺾어라’는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오페라 <리날도> ‘울게 하소서’의 원작 아리아인 이 곡의 익숙한 멜로디가 펼쳐지면서 콘서트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오케스트라는 부드러워졌고 한 음 한 음이 섬세한 금실처럼 반짝였다. 카스페르의 목소리는 음표 하나하나가 슬픔과 체념으로 가득 찼다. 숨을 죽이고 박수를 자제하던 관객들은 결국 환호했고 이 아리아를 기점으로 '아름다움'은 자신의 소망을 바꾸고 뉘우침으로 변했다.
르네 야콥스의 이날 연주는 부드럽게 다가왔다. 헨델의 <메시아>와 같은 합창이 없어 웅장한 감동을 느끼기엔 아쉬움이 남으나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제스처에 세심하게 반응하며 모든 음절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모처럼 예술의전당이 마련한 정통 바로크 음악의 매력에 푹 빠진 시간이었다.
300여 년 전에 작곡된 작품이지만 'Bellezza(아름다움)'처럼 현대 사회는 젊음과 외모에 많은 가치를 두며, 'Tempo(시간)'가 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현대 사회의 딜레마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점에서 가장 현대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클래식 애호가들이 더 다양한 오라토리오와 오페라 공연 등 성악곡을 접하며 균형 잡힌 클래식의 재미를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