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계엄] ⑥ 윤석열과 전두환, 권도(權道)의 '시작'도 '끝'도 달랐다

무력 통치 신군부와 달리 헌정질서 준수 법 형식 갖췄으나 내용적으론 남용 소지 국회 해제 요구 수용···常道로 되돌려놔

2025-03-28     이상헌 기자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 대통령실에서 긴급 대국민 특별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오른쪽은 1980년 5월 17일 국내 전체로 비상계엄령을 확대 조치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연합뉴

정치는 '판단'을 넘어 '결정'하는 일이다. 위기의 순간 결정을 가능케 하는 통치의 기술을 옛사람들은 권도(權道)라 불렀다. 권도는 원칙을 무너뜨리는 편법이 아니라 상황의 무게를 저울질해 마땅한 조치를 취하는 임시의 도리를 뜻한다. 공자가 말한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無可無不可)"는 유연한 처신의 철학, 조선 태종이 폐세자 양녕을 물리고 충녕을 세운 결단도 권도의 실천이었다.

2024년 12월 3일의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두고 과거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과 단순 비교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두 사례는 시작부터 전혀 달랐다. 전두환은 계엄을 확대할 당시 대통령이 아니었고 헌정 절차를 벗어난 무력 통치를 휘둘렀다. 반면 윤석열 대통령은 헌정사상 최초로 비상권이 입법부의 제동 아래 실제로 철회된 사례를 남긴 최초의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 조치는 모두 헌법 제77조라는 같은 조문에서 출발한 듯 보이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차이가 크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계엄령을 확대할 당시 대통령이 아니었고 국회의 통제나 국민적 합의 없이 사실상의 군사쿠데타로 비상권을 행사했다.

1980년 5월 17일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실권자 전두환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곧이어 국회를 강제 해산했다. 민간인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정당·언론·시민단체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당시 그는 대통령이 아니었으나 헌정질서를 우회한 사실상의 무력 통치를 단행했다.

반면 12·3 계엄은 절차적 정당성을 갖췄다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행 계엄 제도가 완전하다고 보긴 어렵다. 법적 형식은 갖추고 있더라도 그 형식을 언제든 악용할 수 있는 구조적 허점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 헌법학계의 공통된 문제의식이다.

고문현 숭실대학교 교수의 '계엄에 관한 연구'(2020)는 대한민국 헌법과 계엄법이 형식상 정당화는 가능하지만 남용 가능성은 매우 높고 통제 장치는 미비하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한 연구다. 그는 계엄 선포 요건에 명시된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병력 사용'이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포괄적이며 "자연재해, 감염병, 대규모 시위 등 다양한 위기 상황에 계엄 선포를 적용할 수 있는 확장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고 우려했다.

또한 비상계엄 하에서는 군이 행정·사법 기능을 접수하고 하위 명령인 포고령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밖에 없는 수단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합법이라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매우 위험한 제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사법적·입법적 통제를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논문의 핵심 메시지다.

1972년 10월17일 전자관보에 게재된 ‘계엄포고’ 제1호, 1980년 5월 17일 선포된 '계엄포고령 제10호', 윤석열 계엄사령부가 지난 12월 3일 발표한 포고령 제1호 / 국가기록원 자료 취합

이러한 논의는 독일의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의 비상권 개념과도 연결된다. 칼 슈미트는 주권을 '비상상태를 결정하는 자'로 규정하며 예외의 선언이 질서를 구성하는 출발점이라고 봤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러한 슈미트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예외 상태는 일시적인 비상조치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통치 방식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12·3 계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비상조치가 예외에 머물렀는지 아니면 통치의 상시 도구가 되려 했는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대목이다.

윤석열 정부의 계엄 철회는 현행 제도가 작동한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과거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기 국회는 침묵했고 거대 여당도 방조했다. 공화당과 민정당 등 여당이 의회를 장악해 계엄을 중단시킬 유인이 없었던 반면 윤석열 대통령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민의힘 한동훈계 의원 일부가 이탈하며 결과적으로 계엄 철회라는 결정을 수용했다. 비상권이 입법부 압박에 의해 실질적으로 제어된 첫 사례로 계엄이 일방적인 통치 수단이 되기 어렵다는 전례가 될 전망이다.

뉴스타파 등 일부 매체는 헌법재판소의 한덕수 총리 탄핵 기각 결정을 계기로 윤석열 정부의 국무위원들을 전두환 정권의 국무위원들과 나란히 비교하며 "역사는 반복된다"고 주장했다. 헌재는 재판관 9명 중 문형배, 이미선, 김형두, 정정미, 김복형 등 5명이 기각, 정계선 1명이 인용, 정형식·조한창 2명이 각하 의견을 냈고 의결정족수인 6명에 미달해 최종 기각 결정을 내렸다.

전두환 정권의 국무위원들은 계엄 확대와 국회 해산, 민간 군사재판 등을 사실상 방조했으나 헌정 체계가 마비된 상황에서 법적 책임조차 제대로 묻지 못했던 반면 윤석열 정부의 국무위원들은 책임 유무가 엄격히 따져졌고 총리의 직무도 헌재의 결정에 따라 복귀한 것이다. 

헌법 제77조와 계엄법은 대통령에게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서 '병력으로써 군사상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계엄 선포를 허용한다. 이 조항 자체는 형식 요건만 충족되면 정당화가 가능한 구조다. 같은 법률에 기초해도 △누가 △어떻게 △어떤 절차를 거쳐 행사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띄는 구조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군은 행정권과 사법권을 일부 접수하고 포고령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 여권 관계자들 사이에선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이 법적 요건에 부합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일부 위법적 소지가 있는 문구가 포고령에 포함되었더라도 그 자체로 대통령을 파면할 정도로 중대한 헌법 위반은 아니라는 시각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월 1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8차 변론'에 출석해 자리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의 12·3 계엄은 법적 요건을 충족했지만 그 내용과 정치적 맥락은 정밀한 판단을 요구하는 사안이었다. 일부 포고령 문구에 법률 위반 요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곧바로 '파면'이라는 극단적 수단으로 연결짓는 것은 오히려 헌정 질서에 새로운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헌법재판소가 내린 결론과도 맞닿아 있다. 당시 재판부는 "탄핵 심판 청구가 이유있는 때란 공직자의 파면을 정당화할 정도로 중대한 때만 해당된다"며 "민주적 절차를 통해 부여한 직책을 박탈해서 불러온 국가적 손실, 국론 분열, 반목 등의 혼란에 상응할 만한 탄핵사유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며 기각을 결정했다.

12·3 계엄은 ‘공공의 안녕질서’를 명분으로 비상권을 허용한 포괄적이고 모호한 법 조항의 허점에서 출발했다. 위기가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채 윤 대통령에게 넓은 재량이 허용된 계엄은 태평한 때에도 비상권이 발동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이는 이방원의 명재상 권근이 말한 바와 같이 "태평한 시기에 권도를 남용하면 오히려 혼란(禍亂)을 부를 수 있다"는 경고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결국 국회의 해제 요구를 수용하면서 권도의 실천을 멈추고 국정을 다시 상도(常道)의 궤도로 돌려놓았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