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코츠월드 100마일 트레킹, 첫째 날
[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치핑 캠던서 브로드웨이 마을 거쳐 스텐톤까지 몸은 힘들었지만 정서적으론 너무나 충만했다 숙소 앞마당 수선화가 수고했다며 반겨주는 듯
코츠월드 100마일 트레킹, 첫날.
오랫동안 꿈꿔온 코츠월드웨이 트레킹의 시작점 치핑 캠던에서 스탠톤까지 17킬로미터를 걸었다. 걷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물론 평소에도 걷긴 했지만 이건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의식 있는’ 걷기다. 낯선 풍경 속을 한 발 한 발 밟으며 ‘나 지금 정말 살고 있어’라는 묘한 감정을 느끼는 그런 종류의 걷기.
그래설까 첫발을 떼면서부터 말도 안 되게 신났다. 언덕을 오르며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는데, 마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걷는다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었나? 나 자신도 놀랄 정도다. 무거운 배낭, 삐걱대는 무릎, 흙먼지가 묻은 바지··· 이 모든 게 자꾸 웃음이 나게 했다. 어쩌면 내가 걷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 풍경 속에 있다는 사실이 좋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출발지는 치핑 캠던. 이름부터 좀 귀엽다. 중세엔 양모 무역의 중심지였다는데 그 시절 사람들이 지금의 내 등산화와 기능성 바지를 본다면 아마도 ‘마법사다!’ 하고 외쳤을 것이다. 치핑’은 고어로 ‘시장’이라는 뜻인데, 말하자면 중세의 트렌디한 비즈니스 허브랄까. 마을 중심에 있는 마켓 홀은 1627년에 지어진 것으로 지금도 여행자들이 그 아래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와, 진짜 오래됐네” 같은 말을 중얼거린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였다. 400년 전 시장터에서 지금은 사람들이 그 아래에서 샌드위치를 먹거나 개를 끌고 지나간다.
도버스 힐로 올라가는 길은 정말 ‘영국답게’ 아름다웠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록 들판이 본격적으로 영국 시골 드라마 배경처럼 펼쳐졌다. 낮은 돌담, 멀찍이 풀 뜯는 양들, 그리고 그 양들을 감시하는 듯한 까칠한 표정의 소들. 도버스 힐은 단순한 언덕이 아니다. 17세기 영국 내전 때 의회군과 왕당파가 맞붙은 역사적인 장소다. 예전엔 말이 달리고 총이 울렸을 그곳에 지금은 기능성 재킷 입은 하이커들이 조용히 지나간다. 인간이 변한 건지 아니면 단지 무기를 하이킹 스틱으로 바꾼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평화롭긴 하다. 조금 낫다.
브로드웨이 타워는 언덕 꼭대기에 딱 박혀 있었다. 여기선 날씨만 허락한다면 영국의 16개 주가 보인다고 한다. 날씨는 당연히 허락하지 않았지만 덕분에 상상력은 아주 넓게 펼쳐졌다. 타워 근처에서 쉬고 있는데 현지 주민이 말을 걸어왔다. 알고 보니 그의 아들이 서울에 있는 은행 지사에서 근무 중이라고 했다.
한국을 얼마나 좋아하던지 뿌듯했다. 특히 카페에서 노트북과 지갑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주문을 하러 가는 사람들 얘기를 듣다 보니 으쓱해져서 한참을 얘기했다. 내가 민간 외교관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불고기’ 발음도 제법 잘했다.
브로드웨이 마을은 ‘그림책 같은’ 풍경으로 유명한데 실제로도 그렇다. 그림엽서 속 풍경 그 자체였다. 금빛 석회암 건물과 꽃이 흐드러진 골목길, 정원마다 주인의 성격이 묻어나는 작은 장식품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쉬는데 왠지 모르게 ‘잘 살고 있다’는 감정이 밀려왔다. 걷는다는 건 어쩌면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를 더 깊이 느끼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스탠톤으로 향하는 길에 관광버스를 타고 마을들을 도는 여행자들을 만났다. 그들이 내게 “혹시 진짜 100마일 걷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네, 첫날이에요” 하고 말하자 그들은 감탄하며 박수를 쳐주었다. “진짜 대단하다”는 말을 들으니, 하루 종일 배낭이 짓누르던 어깨가 갑자기 가벼워졌다. 인간은 타인의 응원으로 작동하는 동물이라는 말,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스탠톤에 도착했을 무렵 해는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마을 입구부터 수선화가 노랗게 피어 있었고 내가 묵을 숙소 앞마당은 거의 ‘수선화 천국’ 수준이었다. 꽃들 사이를 걷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찍어야 해? 아니면 그냥 눈으로 봐야 해?” 결국 둘 다 했다. 수선화가 바람에 살짝 흔들릴 때 그건 마치 이 마을이 ‘수고했어요’ 하고 인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녁은 마을 펍에서. 피시앤칩스, 포크 밸리, 시저샐러드, 그리고 코츠월드 지방의 수제 에일 맥주 한 잔. 테이블에 앉자마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나 오늘 진짜 잘 걸었고 하루를 잘 살았다”였다. 다리는 여전히 아팠지만 그 아픔마저도 오늘 하루의 일부처럼 사랑스러웠다.
걷는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다. 신체적으로는 분명 고된데 정서적으로는 너무나 충만하다. 첫날부터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싶을 정도다. 내일이 기대된다. 물론 내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의 몸 상태는··· 그건 내일의 나에게 맡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