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밸류업 열전 15인의 진단 "韓 증시 리부트 '기업할 자유'가 답"
기업인 옥죄는 상법 개악 해법 모색 이사의 충실 의무 주주로 확대보단 이해관계자론에 입각한 접근법 필요 경영판단원칙, M&A 활성화 주장 多
지난해 글로벌 증시가 활황을 누린 반면 한국 증시는 외면받았다.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 채 해외로 빠져나가는 자금이 시장을 더욱 위축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윤석열 정부는 밸류업 정책을 내세웠지만 주가 부양을 위한 단기 처방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따른다. 기업들도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에 나섰으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부족하다는 평가다. 기업이 자유롭게 혁신하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한국 증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여성경제신문은 한국 증시 리부트: 밸류업 주제의 제9회 금융 포럼을 앞두고 경제·경영·금융·법률·정책 분야 전문가와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들은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주주는 물론 이해관계자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현행 상법 정신에 충실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15인의 전문가들이 제시한 밸류업 해법은 '기업할 자유'(Free to Enterprise)란 키워드로 수렴됐다. 과도한 규제와 경직된 지배구조에서 벗어나 기업인이 시장 논리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밀턴 프리드먼은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에서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경제 주체들이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사상을 한국 증시에 적용해 보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지나친 규제와 정책적 개입이 기업할 자유를 가로막은 결과로 볼 수 있다.
릴레이 인터뷰 첫 번째 주자로 나선 신현한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부의 밸류업 정책이 금융 논리에만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실질적인 산업 성장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가 기업 인수합병(M&A)을 적극 지원하며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것과 달리 한국은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논란에 발이 묶여 있다는 것이다.
이지평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특임교수도 "1% 저성장 시대에 접어든 한국이 투자와 생산성을 높이지 않으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그대로 답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업의 독립적 의사결정을 보장하고 불필요한 규제를 단계적으로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단기 주가 부양이 아닌 자율적 성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증권가에서도 나왔다. 대신경제연구소 안상희 센터장은 주주 환원 정책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기업이 자발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소액주주 보호를 위해 이사회 내 주주 소통 전담 사외이사를 도입해 투자자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국민연금의 적극적 경영 참여와 이해관계자론을 강조한 전문가 의견도 나왔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정부가 산업 구조 개혁 정책을 강화하고, 기업은 승계 구조를 개혁해 경영 역량을 갖춘 리더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단기적 주주 이익 극대화에 치우친 주주 자본주의 관점을 벗어나 장기적 관점에서 ESG 경영을 통해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연임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위축시키는 자본시장법상 '경영참여' 개념을 경영권 분쟁 상황과 구분해 명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경우 공적 연기금이 적극적으로 주식 시장을 떠받친 반면 한국은 국민연금이 글로벌 분산 투자 기조로 전환하면서 국내 주식 투자 비중이 감소했다. 이에 국민연금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연계해 장기적인 주주 가치를 제고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재혁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전무는 상장회사들의 분할·합병 과정에서 소액주주 이익이 외면받는다는 논란과 관련해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가 만능 해결책처럼 논의되는 점을 지적했다. 분할·합병 시 소액주주 보호가 필요하다면 상법 개정보다는 개별적·맞춤형 해결책이 적절하다는 얘기다.
또한 이사의 책임이 모든 주주에게 확장될 경우 소송 증가와 비용 부담으로 인해 기업이 적극적인 투자와 신사업 진출을 꺼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한국처럼 경영권 방어 장치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러한 규제는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밸류업을 위해서는 글로벌 기준과 맞지 않는 규제를 개혁해야 하며 3%룰 폐지, 주기적 지정감사인 제도 개선 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한국 기업들이 행동주의 펀드 공격을 자주 받는 현실을 고려해 포이즌 필, 차등의결권, 황금낙하산 등 경영권 방어 수단을 도입해야 한다고 이 전무는 강조했다.
다수 법학자는 상법 개정 시도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반면,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김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의 제도가 주주 보호보다는 창업주 일가의 기득권 보호에 치우쳐 있다며 상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사전 규제가 강한 반면, 사후 구제는 미흡한 현행 법체계를 비판하며, 상법에 주주 보호 원칙을 도입해 판례 정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우진 교수는 상장기업을 창업주 일가의 전유물이 아닌 주주 간 평등한 원칙이 지켜지는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일본의 밸류업 정책이 자본 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 관행 확립에 초점을 맞춘 점을 제시하며 "주주 환원과 재투자를 어느 정도 균형 있게 할 때 기업 가치가 극대화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김태진 고려대 교수는 주주 이익 극대화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오히려 기업 경영이 위축되고, 주주 간 갈등이 다양화하는 부작용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해관계 간 균형을 맞추려면 무엇보다 기업가 정신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했다.
'상법 개정론'을 반기업 포퓰리즘으로 규정한 한석훈 국민연금 투자정책위원장은 이재용 회장이 겪은 10여년의 사법 족쇄를 사례로 들며 "기업인을 죄인 취급하는 반기업 정서가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무엇보다 경영판단 원칙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재열 경희대 교수도 MBK파트너스의 고려아연 경영권 침탈 시도를 사례로 "적대적 M&A에 대한 적절한 방어 수단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IMF 외환 위기 이후 지주회사 제도가 도입된 이래 30여 년 가까이 지속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인엽 동국대 교수는 "기업집단 지정, 상속세, 금산분리 등으로 인해 기업 가치가 저평가되고 있다"며, 상속세 완화와 시장 중심적 접근을 통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세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를 단순한 지배구조 문제로 보기보다 노동시장 경직성과 금산분리 규제 등 기업 환경 전반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이 성장하고 주가가 오르려면 돈을 잘 버는 환경이 조성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M&A 활성화가 필수적이지만 한국은 노동시장 경직성으로 인해 기업이 아무런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특히 삼성그룹은 기업할 자유를 보장받지 못해 성장이 정체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정부는 과거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전환을 원했으나, 공정거래법상 금융지주회사는 비금융 자회사를 둘 수 없고 일반 지주회사는 금융사를 소유할 수 없다는 규제 때문에 전환이 불가능해졌다. 정부가 30년 동안 주주환원 정책과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했지만 오히려 최대주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만 흘러갔고 결과적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거래소 가이드라인인 주가순자산(PBR) 비율 기준의 함정을 지적했다. PBR이 낮다고 해서 반드시 기업이 저평가된 것은 아니며 이는 기업의 수익성, 배당정책, 레버리지 활용도 등 여러 요인이 있다. 한국 기업들은 안전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 PBR이 낮지만 이는 자본 배치 전략의 차이일 뿐 비효율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예기다. 그러면서 "자본시장 역동성 제고를 위해 대기업도 이제는 밸류업에 적극 뛰어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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