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웅익 더봄] 경희궁에 남아있는 추억의 흔적을 찾아서

[손웅익의 건축 마실] 자의 반 타의 반 인연이 만든 잊지 못할 젊은 시절의 추억

2025-03-10     손웅익 건축사·수필가
일부 복원된 경희궁 /그림=손웅익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고등학교별 입시 시험이 없어지고 평준화라는 명목으로 추첨제로 바뀌었다. 소위 뺑뺑이라 불렀는데 나는 운이 좋아 지금은 경희궁으로 복원된 그 자리에 있던 명문 고등학교에 자의 반 타의 반 입학하게 되었다. 뺑뺑이로 입시제도가 바뀐 것이 ‘타의’라면 서울 외곽 동네인 면목동에 살면서 공동 학군인 서울 중심부에 있는 고등학교를 지망한 것은 '자의‘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경희궁에 별 관심이 없었다. 교정에 남아있는 경희궁 유적에 얽힌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전부였다. 교사 뒤 산비탈은 큰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바위 아래 움푹 팬 곳에서 샘물이 솟고 있었다. 그곳이 장희빈의 목욕 터라고 했다. 동기들과 지나다니면서 더러 농을 했고 장희빈의 목욕 장면을 상상하기도 했다.

최근에 내가 해설하는 ‘정동길 건축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경희궁을 여행하게 되었다. 복원된 이후에 경희궁을 몇 차례 가보긴 했으나 그 장희빈의 목욕 터를 잊고 있었다. 건축 여행 중에 문득 생각이 나서 수강생들과 전각 뒤 바위를 오르게 되었다. 과연 그 바위는 그대로 남아있었고 지금도 맑은 샘물이 솟고 있었다.

경희궁 우측에는 수령 38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경희궁 건축 시기가 광해군 15년, 즉 1623년경이니 그때부터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이제 몸통은 뻥 뚫리고 얇은 외피 줄기만 남았다. 그러나 가지마다 새로 잎이 돋을 때 보면 풍성하고 그 색이 참 곱다.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이곳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도 사연이 기구하다. 흥화문은 일제 강점기 때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혼을 기린다고 장충단을 파괴하고 세운 박문사로 옮겨진다. 그러다가 해방 후 박문사 자리에 세워진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경희궁 터에 있던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사 가고 나서 1980년대 후반 경희궁 복원을 하면서 흥화문이 경희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흥화문은 최초 건축 당시에는 구세군회관 인근에 서 있었는데 복원 과정에서 지금의 위치, 즉 과거 서울고등학교 정문 자리에 세워버렸다.

어쨌든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등학교 3년을 다니고 대학에 진학해서 건축을 전공했다. 졸업하던 해 나를 좋게 본 건축과 선배의 추천으로 건축가 김수근이 운영하는 ’공간‘에 입사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입사를 앞두고 고민을 거듭하다가 입사를 포기했다.

우선 경제적인 문제가 있었다. 당시 ’공간‘에서는 도제들에게 월급을 제대로 안 주고 푼돈 주듯이 몇만원을 주기도 하고 안 주기도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쟁쟁한 선배들 밑에서 규모가 큰일을 수행하다 보면 건축설계 이외의 여러 가지 일을 배울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나의 최종 목표는 건축사 자격을 취득해서 건축사사무소를 개업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려면 디자인, 설계, 감리, 인허가, 시공 등을 두루두루 배울 수 있는 작은 사무소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심이 서자 몇 년 선배가 실장으로 있는 건축설계 사무소에 찾아가서 취업을 부탁했고 그 사무소에 다니게 되었다.

그 건축사사무소는 신문로 피어선 빌딩 9층에 있었는데 내 자리에서 창문을 내다보면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교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당시에는 아직 경희궁으로 복원되기 전이라 교문과 교사가 예전 그대로 남아있어 추억에 잠기곤 했다.

고교 시절 추억이 남아있는 느티나무 /그림=손웅익

봄에 교문을 들어서면 은은하게 날리던 라일락 향기가 생각난다.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던 시절, 교정을 들어서면 온몸을 감싸던 그 라일락 향은 내 영혼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

미술 시간이면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림을 그렸다. 언젠가는 느티나무를 그리다가 하늘을 온통 벌겋게 칠해버린 적이 있다. 좀 흉측한 그림이었지만 미술선생님은 내 그림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셨다. 친구들과 축구하고 체력장을 연습하던 대운동장에는 서울역사박물관이 자리 잡았다.

경희궁 뒤로 거대한 바위산인 인왕산이 보인다. 고등학교 교가의 첫 소절은 ‘인왕의 억센 바위···'로 시작한다. 돌이켜보니 인왕산 바위처럼 억세게 살아온 세월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고등학교 까까머리 시절 추억의 흔적들은 경희궁에 그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