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세의 실버타운 탐방기] 2. 동해약천온천 실버타운 ② 고국 아동에게 미국 영어연수를 자비로 후원하는 재미교포 김벤
동해시 아동들에게 무료로 영어 가르쳐 자비로 매년 6명씩 미국 연수 계획도 아이들의 마음을 열어주는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필자는 전국의 실버타운을 조사해 <실버타운 사용 설명서> 책에서 34곳을 분석했지만 숫자로 정리된 정보만으로는 실버타운의 진짜 모습을 다 담을 수 없었다. 실버타운의 가치는 결국 '사람'에서 나온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입주민들의 삶 운영자의 철학 그리고 실버타운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모여야 비로소 한 곳의 실버타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탐방기는 직접 현장을 방문해 운영 책임자나 입주민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실버타운의 실상을 전하고자 한다.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이야기들과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실버타운의 면면을 풀어낼 계획이다.
강원도 동해시에 위치한 동해약천온천 실버타운은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 교포들에게도 주목받고 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동해바다와 천연 온천이 어우러진 이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입주민 김벤(80세, 한국명 김윤기)씨를 만났다. 그는 50년간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2024년 한국으로 돌아와 실버타운에서의 삶을 선택했다. 김벤씨는 이곳에서 단순한 노후 생활이 아닌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와 교육 활동을 병행하며 더욱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해외에서의 삶과 한국으로의 귀환
1945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그는 1974년 29세의 나이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이후 캐나다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Korean Canadian News’를 창간하여 운영했으며 1984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콜로라도 코리안저널’의 편집장을 맡았다. 이후 LA에서 광고 마케팅 회사를 설립하며 성공적인 이민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50년이 흐른 뒤 그는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다 2023년에 동해약천온천 실버타운에서 체험 숙박을 해보고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문득 이곳이 계속 떠오르더군요. 아내가 세상을 떠난지 2년된 빈집에서 하루 하루 밥해 먹으며 지내다 보니 ‘내가 미국에서 혼자서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귀국을 고민하게 됐죠."
결국 2024년 미국의 집을 팔고 모든 살림살이를 정리한 뒤 한국행을 택했다.
김벤씨가 처음부터 실버타운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전원주택이나 아파트 등 여러 거주 방식을 고려했지만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건강하게 지낼 수 있으면서도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실버타운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는 나와 맞지 않았어요. 반면 동해약천온천 실버타운은 산과 바다가 함께 있는 곳이라 공기도 맑고 자연 속에서 생활할 수 있죠. 게다가 걸어서 30분이면 바닷가에 도착할 수 있고 차로 10분이면 동해시 다운타운에 나갈 수 있어요. 미국의 한적한 소도시 같은 느낌이라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건강한 생활과 실버타운에서의 일상
김벤씨의 첫인상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탄탄한 몸매에 놀란다.
"80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몸이 엄청 좋으세요. 여름에 수영복 입은 걸 보면 남자들도 부러워할 정도예요." – 동해약천온천 실버타운 운영을 맡고 있는 서영호 과장의 말이다.
또 다른 미국 교포인 김순미 여성 입주민도 한 마디 덧붙였다.
"저도 여름에 우연히 망상 해수욕장 바닷가에서 뵌 적이 있는데 평소 헐렁한 옷을 입고 다니시다가 그때는 웃통을 벗은 모습이었는데 깜짝 놀랐어요. 정말 멋지세요. 운동을 정말 열심히 하셨나 봐요."
김벤씨는 평생 꾸준히 운동을 해왔다. 미국에서도 요가와 명상을 비롯해 수영을 했고 한국으로 귀국해 실버타운에 입주한 후에도 이 같은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저는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해요. 이곳 실버타운에 와서도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드럼도 치고 글도 씁니다."
그는 2024년 자신의 경험과 인생 이야기를 담은 수필집 『삶의 여정에서 건져 올린 조각들』을 출간했다.
"이민자의 시선에서 본 삶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미국에서 쓴 글뿐만 아니라 실버타운에 입주한 후 동해시에서 발행하는 잡지에도 기고한 글들을 모아 책을 냈습니다."
한국 청소년을 위한 특별한 계획
김벤씨는 단순히 개인적인 여유를 즐기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지역 청소년을 위한 재능기부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현재 그는 동해시 마중물 지역아동터에서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의 영어 교육 방식은 문법과 입시에만 치우쳐 있어서 학생들이 10년 이상 영어를 배워도 실제로 외국인과 대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저는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김벤씨는 마중물 지역아동센터와 협력하여 내년부터 매년 6~7명의 아이들을 자비로 후원하여 미국 연수를 진행할 계획이다.
"내년부터 2주 동안 아이들을 디즈니랜드, 유니버설 스튜디오, 샌디에고 시월드, 라스베이거스 등에 데리고 다니면서 영어도 익히고 미국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마침 동해약천온천 실버타운에서 같이 생활하는 다른 교포 입주민이 라스베이거스에 빈집이 있는데 숙소로 제공해 주신다고 하셔서 더욱 힘이 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실버타운 입주민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 실버타운 입주자가 본인 돈으로 고국의 아이들을 미국 연수 보내는 건 정말 감동적이에요." (김순미 입주민)
사랑과 감사의 문화, 그리고 허그(Hug)의 힘
김벤씨는 단순히 영어를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따뜻한 감성과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바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허그(Hug) 문화다.
미국에서는 부모와 자식, 친구, 친지, 그리고 선생님과 학생 사이에서도 허그가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허그는 단순한 신체적 접촉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를 전하는 강력한 도구다. 허그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따뜻한 정서적 유대가 흐르고 관계가 돈독해지며 환경도 긍정적으로 변화한다.
이를 위해 김벤씨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마중물 지역아동센터에서 영어 회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외친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채 기도하듯이 소리 내어 함께 말하고 짝꿍과 마주 보며 “사랑해, 고마워”를 전한 뒤 서로 가볍게 안거나 두 손을 마주쳐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김벤씨는 꼭 아이들에게 묻는다.
“오늘 집에서 엄마 아빠와 허그를 했나요? 여기 마중물 센터에서 선생님들과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나누었나요?”
아이들은 대부분 가정과 센터에서 이를 실천하고 있다고 답한다. 이를 더욱 확산시키기 위해 김벤씨는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스티커 1,000개를 제작하여 아이들과 실버타운 입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마중물 아동들은 이 스티커를 몇 개씩 챙겨 친구들에게도 선물하며 자랑스러워했다. 김벤씨의 가방과 주머니에는 항상 이 스티커가 준비되어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감사의 힘을 심다
김벤씨는 ‘감사의 힘’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확실히 작용한다고 믿는다. “감사의 힘에 대한 연구는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입증되었어요. 뇔르 넬슨과 지니 칼라바의 저서 그리고 제레미 스미스의 감사의 재발견등 다양한 연구에서 감사의 효과가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벤씨가 감사의 힘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자신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생활할 때 집안 곳곳에 ‘LOVE THANKS’라는 문구를 붙여놓고 살았어요. 냉장고 문, 방문, 화장실 거울, 책상, 컴퓨터 위, 심지어 물병과 밥솥까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감사의 말을 매일 눈으로 보고 되새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삶의 태도도 변화한다고 믿었다.
감동적인 순간 아이들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연
지난해 연말 마중물 아이들은 동해약천온천 실버타운을 찾아 입주민들을 위한 위문 및 재능 발표회를 열었다. 이 공연에서 아이들은 단순히 노래나 연주를 선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입주민 모두에게 먼저 다가가 허그를 하며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스티커를 선물로 나눠주었다.
공연에서는 아이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영어 실력을 뽐내며 자기소개를 하고 친구와 함께 짧은 영어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어서 피아노, 바이올린, 드럼 연주와 함께 팝송과 K팝을 불렀다.
아이들이 부른 곡목은 다음과 같다.
- 팝송: You Raise Me Up, If I Sing You a Love Song, Lost Control, Crying in the Sun, No Matter What
- K팝: One Voice(보아), 걱정말아요 그대(전인권), 웃은 죄(장사익), 아파트(로제), 그래요(박앵두),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들처럼(강산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안치환), 넌 할 수 있어(강산에)
올해 연말까지 레퍼토리는 더욱 늘어날 예정이다. 그리고 김벤씨는 2025년 연말에 ‘마중물 아이들과 김벤의 드럼 콘서트’를 동해약천온천 실버타운 극장에서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가 만들어가는 변화
김벤씨는 실버타운에서의 생활이 단순한 안식처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서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아이들에게 허그 문화를 전하고 감사의 습관을 심어주며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작은 말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힘이 된다고 강조한다.
마중물 아이들은 이제 영어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 변화는 실버타운 입주민들에게도 번져가고 있다.
2025년 ‘마중물 아이들과 김벤의 드럼 콘서트’가 동해약천온천 실버타운 극장에서 울려 퍼질 때 그들의 목소리 속에는 단순한 음악 이상의 메시지가 담겨 있을 것이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