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제노바(Genova)-파괴되지 않는 운명의 항구도시
[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어쩌다 한 달, 이탈리아 (7) 위대한 항해자, 콜럼버스의 고향 크고 부유하고 대담한 꿈의 도시 이탈리아 정통 라이프 스타일, 가족 경영
제노바는 상상보다 컸다. 크기도 컸고, 아름다움도 배로 컸다. 주차를 하고 페라리 광장, 콜럼버스의 집, 가리발디 거리를 돌아보며 이미 마음이 스르륵 열렸다. 도시를 걷다 보니 오토바이가 정말 많다. 어디서 이렇게 많이들 튀어나오는지 모르겠지만, 틈만 나면 질주하는 그들의 속도감에 놀랐다. 특히 콜럼버스의 집 앞의 광장에 주차된 오토바이들은 마치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오토바이들을 모아둔 것이라고 해야 믿을 만큼 많다. 언제나 오토바이는 동남아 특히 베트남을 연상시켰는데 이제는 제노바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제노바를 이야기할 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빼놓을 수 없다. 콜럼버스는 이 도시에서 태어나 좁고 소박한 집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의 꿈은 제노바의 좁은 골목을 벗어나 광활한 대양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당시 제노바는 해양 공화국으로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 중심지였고 수많은 항해자가 이곳에서 길을 떠났다. 어린 콜럼버스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며 지도 제작과 항해술을 익혔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그가 어릴 적부터 부두 근처를 배회하며 선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바다를 꿈꾸며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의 꿈을 실현해 준 곳은 제노바가 아니다. 그는 이곳에서 지원을 받지 못해 스페인으로 떠나야 했고 결국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의 후원 아래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다. 죽기 전까지 자신이 발견한 곳이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지만···.
콜럼버스의 집에 갔을 때 그 유명한 탐험가가 살던 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작고 소박한 집에 놀랐다. 그는 진짜 가난했던 것 같다. 위대한 꿈을 꾸고 거대한 일을 이루었던 사람이 실은 이렇게 보잘것없는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묘하게 감동을 주었다. 오늘날 제노바에는 콜럼버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의 생가로 알려진 집, 그의 이름을 딴 거리, 그리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까지. 그리고 어쩌면 제노바의 바닷바람 속에는 아직도 그의 꿈이 스며 있는지도 모른다.
콜럼버스 집을 나와 다음 목적지는 대성당이었는데 가는 길목마다 성당이 있어 발길을 계속 멈추었다. 사실 어디를 꼭 구경하는 것이 크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제노바 자체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며칠 더 머물며 궁전이며 미술관, 골목까지 구석구석 보고 싶었지만 겨우 하루뿐이라 아쉬웠다.
제노바에서는 발이 바빴다. 놓치고 싶지 않은 장소 사이를 뜀박질 수준으로 이동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너무 슬퍼하지 말자. 우리를 기다리는 또 다른 중세 도시들이 많으니까.”
제노바는 단순한 항구 도시가 아니다. 중세 지중해 무역의 중심이었고, 바다를 지배하던 해상공화국 중 하나였다. 전설에 따르면, 제노바의 바다는 바다의 신 넵튠이 직접 지켜주는 곳이었다고 한다. 한때 한 어부가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었지만, 거대한 손이 파도를 가르고 그를 안전한 항구로 인도했다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제노바 항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제노바 사람들의 바다 사랑 혹은 자부심을 더 굳건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도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그야말로 위엄 있고 장엄하다. 배들이 끊임없이 드나들고, 펼쳐진 대양을 향해 도전장을 내미는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제노바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전설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콜럼버스 집 옆에는 11세기 수도원의 회랑이 남아있다. 산탄드레아 델라 포르타 수도원은 1000년대 초반에 세워졌지만, 도시 재정비와 이탈리아 은행 건물 공사 때문에 통째로 철거되었다. 보존하기로 한 유일한 부분이 회랑인데 해체되어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시대의 풍파를 온몸으로 견딘 유물이다. 회랑의 기둥머리를 보면 12세기 중반 로마네스크 양식인데, 프랑스 북부의 조각 기법으로 중세 동화와 성경 속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수도원에 얽힌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는 바로 ‘잃어버린 수도사의 전설’이다. 14세기경, 한 수도사가 밤마다 신비한 불빛을 따라가던 중 실종되었다고 전해진다. 몇 년 후, 한 어부가 바닷속에서 사라진 수도사의 십자가를 발견했는데 그 이후 이 수도원의 유적 근처에서 밤이 되면 희미한 빛이 떠다닌다나.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제노바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아직도 몇몇 주민들은 늦은 밤 그 빛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걸어 다니다 보니 배가 출출해졌다. 맛집 감별 회로를 작동시켜서 Rolls and Rost에서 햄버거를 시켰다. 튜린에서 생산되는 콜라에 햄버거를 한입 베어 무니 세상 행복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다. 역시 먹어야 기분도 기운도 살아난다. 디저트는 당연히 젤라토. 제노바에서의 마지막 한 숟갈까지 완벽했다.
제노바의 대성당은 독특하고 아름답다. 피렌체의 대성당이 핑크빛 대리석을 주로 사용했다면, 여기는 녹색과 흰색이 절묘하게 섞여 있다. 대리석으로 색을 다르게 맞추는 솜씨가 마치 붓으로 칠한 듯 정교하다.
차원을 넘는 예술성에 감탄하는 중에 제노바 대성당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도 들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12세기 십자군 원정 때 이슬람군과의 전투에서 제노바가 승리하고 가져온 검은색과 흰색 대리석이 대성당의 외관을 장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대리석 중 일부는 성당을 보호하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는데 그래서인지 실제로 여러 전쟁과 지진 속에서도 대성당만은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제노바 사람들은 이것을 신의 가호로 받아들이고, 대성당을 신성한 장소로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 대리석의 신비한 힘에 관해 이야기하며 대성당을 방문할 때마다 손으로 대리석을 쓰다듬으며 소원을 빈다.
대성당 내부에는 전혀 뜻밖의 유물도 하나 있다. 바로 네이팜 폭탄이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이 투하한 폭탄이 성당 지붕을 뚫고 떨어졌지만, 기적적으로 폭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신의 보호 덕분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 폭탄은 대성당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대성당은 제노바 사람들에게 신앙과 역사적 자부심의 상징인 셈이다.
오늘 밤은 라스페치아, 친퀘테레로 이동하기 편리한 곳에 자리한 레반토 캠핑장을 골랐다. 후니가 몇 년 전 들렀던 곳을 기억으로 더듬어 찾아왔다. 체크인 리셉션에는 오래된 창업자 부부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우리를 안내한 청년의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라고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어받고 부모님이 운영 중인 이곳은 3대째 운영하는 캠핑장이다. 언젠가 자기가 이어 운영하게 될 거라며 웃는다. 대를 잇는 가족 경영은 정통 이탈리아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한다.
캠핑 사이트는 작아도 시설은 좋다. 세월을 따라 꼭 필요한 것이 꼭 편안한 동선에 배치된 것처럼 시간을 타고 잘 익은 시스템이다. 그렇다고 해도 캠핑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직 추위를 느끼게 하는 새벽공기 속에 샤워장으로 이동해야 하고 음식을 해 먹고 분리수거에 설거지까지 마쳐야 한다. 당연히 호텔에서 먹고 자는 것처럼 안온할 리가 없다. 그래도 자연 속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노상에서 자는 것이 어쩌면 체질이었는데 이제 발견한 것일까?
팀과 함께하는 것에도 슬슬 노하우가 쌓여간다. 캠핑에 서툴면서도 가장 큰 텐트를 가져온 나는 느림보라는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후니는 운전을 도맡아 하고 음식도 잘하는 만큼 늘 급하다. 미 선배는 똑떨어지는 알뜰 선장이다. 후니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 버겁고 미 선배와 알뜰의 기준 때문에 부딪히지만 서로 맞춰가며 가는 것이 여행의 묘미 아니겠나. 이번 여행은 알뜰 훈련이 될 것 같다. '알뜰살뜰'을 부르짖고 있으니 저절로 최소 지출 여행을 기록하게 될 것이다. 돌아갈 때쯤 지중해의 햇살만큼 짠맛도 맛있게 들어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