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밸류업] ① 금융 논리에 갇힌 한국, 산업 포기해선 안 돼
신현한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인터뷰 정부 밸류업 정책, 단기 주가 부양에 그쳐 일본 정부가 인수합병 적극적으로 지원 韓 실익 없는 경영권 승계 논란에 발 묶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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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글로벌 증시는 활황을 누렸지만 한국 증시는 소외됐다. 투자자들의 실망감은 해외로 향하는 자금 흐름으로 이어졌고 국내 시장은 투자 심리 위축과 자금 유출의 악순환을 겪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밸류업 정책을 통해 한국 증시의 가치를 높이고자 했지만 단기적인 주가 부양책 위주라는 한계가 지적된다. 기업들도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 등 주주 친화적 정책을 펼치고 있으나 장기적인 성장을 이끌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다. 기업이 자유롭게 혁신하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하지만 주주가치 극대화와 함께 기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가치를 반영하는 밸류업(Value-up) 정책이 부재한 실정이다. 이제는 단기 주가 부양책이 아닌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끄는 전략이 필요하다. 여성경제신문이 [2025 한국 증시 리부트: 밸류업] 금융포럼에 앞서 각계의 전문가를 만나 실질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한다. [편집자 주] |
"한국 증시는 글로벌 시장에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기업의 성장 가능성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기업이 자유롭게 혁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주가지수는 최소 3200 이상으로 오를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 현대차가 애플, 포드보다 낮은 가치로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현한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는 한국 증시가 저평가된 이유로 기업 성장과 혁신을 뒷받침하는 정책의 부재를 꼽았다. 단기적인 주가 부양책보다 기업이 자유롭게 투자하고 확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밸류업 정책을 표방하며 자사주 매입·배당 확대 같은 단기적인 조치에 집중하고 있지만 기업이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은 소홀한 상황이다. 일본이 규제와 산업 정책을 병행하면서 닛케이 지수를 4만 이상으로 끌어올린 것과 대비된다.
특히 금융 자본 논리가 산업 자본을 압도하는 구조가 문제로 꼽힌다. 한국은 자본시장에서 산업 자본의 현실을 반영하기보다 금융 중심의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이는 혁신 기업이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저해하며, 기업들이 "차라리 상장 폐지가 낫다"고 토로하는 원인이 된다.
윤석열 정부의 밸류업 정책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최고 수준의 재무학자로 꼽히는 신현한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가 여성경제신문과 만나 원인과 해결책을 진단했다.
신 교수는 "한국의 상장 유지 요건이 해외에 비해 특별히 혹독한 것은 아니지만 기업 규모를 고려하지 않고 동일한 수준의 규제를 적용하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업의 성장과 혁신을 가로막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해소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ㅡ최근 한국에서 규제 때문에 상장 폐지하는 기업 사례가 많다. 해외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국내 상장 유지 요건이 해외에 비해 혹독한 편인지 궁금하다.
"국내외적으로 기업이 상장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 미국은 1990년대 중반까지 상장 기업이 8000개 정도였지만 현재 4300개 정도로 줄었다.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가 2002년 도입된 '사베인즈-옥슬리법(SOX)'이다. 월드컴 등 대형 회계 부정 사건 이후 내부 회계 관리 강화를 위한 규제가 생기면서 기업들의 부담이 커졌다. 결국 많은 기업이 상장을 유지하는 대신 비상장으로 전환했다.
또한 상장 유지 요건이 해외보다 가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업 규모를 고려할 때 같은 수준의 규제를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애플, 구글, 테슬라 같은 미국 기업들은 압도적인 자본력을 갖췄지만 한국은 대기업조차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중소·중견기업은 미국이라면 상장 대상이 되지 못할 규모다. 그럼에도 동일한 수준의 규제와 공시 기준을 요구받는 것이다.
기업 공시 업무에는 비용이 수반된다. 중소·중견기업은 대기업처럼 공시 담당 인력을 충분히 둘 수 없어 규제를 충족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해외에서는 이런 기업들이 벤처캐피털이나 사모펀드(PEF)로부터 투자를 받으며 성장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선 상장사로 만들어 규제를 부과하니 부담이 커지고 있다."
ㅡ정부의 밸류업 정책은 자사주 매입 및 처분 공시 의무 강화에 그치는 등 일부 기업에는 과도한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비판이 있다. 이런 부작용을 완화하고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정부 정책은 무엇일까.
"기업 가치가 높아지려면 세 가지 요소가 뒷받침돼야 한다. 첫째, 수익을 내야 하고 둘째, 자본 조달 비용이 적어야 하며 셋째,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기업은 규제와 상속세 부담으로 인해 성장 투자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만으로 밸류업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는 건 무리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추진해 왔고 이제는 제도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투명성이 확보된 상태다. 여기에 더해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정부가 금융 논리만을 앞세워 단기적 조치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업 입장에서 성장 투자를 하고 싶어도 규제 장벽이 많다. 새로운 사업을 추진했다가 규제에 막혀 손실을 본 사례도 많다. 대표적으로 LG이노텍의 LED 사업이 있다. 정부가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하면서 이미 투자한 1조2000억원을 사실상 회수할 수 없게 됐다. 이런 환경에서는 기업이 공격적으로 투자하기 어렵다. 정부가 할 일은 밸류업을 명분으로 불필요한 규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사업 투자와 해외 시장 개척을 지원하는 것이다."
ㅡ일본은 도쿄거래소가 주가순자산비율(PBR) 1 이하 기업을 퇴출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강화했는데 한국과는 사정이 다르다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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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어해설 : 주가순자산비율(PBR) 기업의 시장가치와 장부가치를 비교하는 지표인 PBR(Price to Book-value Ratio)은 '주가/주당순자산가치(BPS)'로 구해진다. 주식시장에선 기업의 저평가 또는 고평가 여부를 판단하는 척도로 활용되는데 PBR이 1이면 시장가치와 장부가치가 동일하다는 의미이고 1보다 낮으면 기업이 시장에서 장부가치 이하로 평가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
"일본의 밸류업 정책을 한국이 벤치마킹한다고 하지만 반쪽짜리 정책에 불과하다. 일본은 기업들에게 규제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유도하는 지원 정책도 병행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기업 지원 없이 밸류업만 강요하고 있어 오히려 상장 폐지를 원하는 기업이 늘어나는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유럽이 경제적으로 쇠퇴한 이유 중 하나가 모험 자본을 인정하지 않은 데 있다. 한국도 일본의 규제를 따르면서 유럽형 자본 시장 구조를 갖게 된다면 결국 은행 중심의 자본 조달 방식으로 고착될 위험이 있다. 은행은 안정성을 중시해 담보가 없는 기업에는 돈을 빌려주지 않기 때문에 혁신 기업들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일본은 기업이 수출하거나 인수합병(M&A)을 추진할 때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미국은 반도체 업계를 지원하며 TSMC가 미국에서 사업할 경우 세금을 면제해 주고 부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운동장 위에서 모험 자본이 혁신 스타트업에 계속 투자하며 테슬라 같은 기업이 나올 수 있었다. 기업 혁신과 성장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밸류업 정책은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ㅡ현대차와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기업임에도 PBR이 낮다. 반면 애플, 포드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격차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새로운 기회를 찾아 혁신해야 한다. 애플과 포드는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현대차와 삼성전자는 아무런 실익 없는 경영권 승계 논란에 발이 묶여 있다. 현대차는 상속 문제로 고민이 많고 삼성전자는 이미 상속을 마쳤음에도 여전히 법적 문제에 휘둘리고 있다.
경영진이 언제든 사법 리스크에 노출되는 환경에서는 장기적인 사업 전략을 세우기가 어렵다. 일반인도 조사받으라는 영장 한 장만 받아도 밤잠을 못 이루는데 대기업 오너라고 다를 게 없다. 이런 불확실성이 지속되면 경영진은 혁신보다 방어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결국 기업의 미래 성장 가능성이 작아 보이게 되고 이는 PBR이 낮게 형성되는 주요 원인이 된다."
ㅡ결국 기업의 장기적 가치보다 단기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 치중된 한국 자본시장의 특성이 코리아디스카운트로 이어진다는 말씀 같다.
"단기 이익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자사주 매입과 배당이다. 투입된 자본을 줄여 자기자본이익률(ROE)를 인위적으로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인 수익률 개선에 불과하며 지속 가능한 밸류업 전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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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어해설 : 자기자본이익률(ROE)과 주주환원율(TSR) 주식 시장에서 통용되는 지표인 ROE는 '당기순이익/평균자기자본*100'이라는 산식으로 구해진다. 자기자본의 주요 구성항목은 자본금과 자본잉여금, 이익잉여금, 자사주다. 다른 항목은 플러스로 자사주 매입은 마이너스로 계상된다. 경영자 입장에서 분자를 늘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자기자본을 줄이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ROE가 밸류업 지표로 강조되면 경영인이 분모에 손대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TSR은 '(자사주매입+배당)/순익'을 의미한다. 기업이 주주에게 주는 것이 많으면 투자자에게 인기가 높아져 주가가 올라간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배당은 환원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사주 매입은 환원이 아니라는 것이 경영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
정부 역시 기업에 같은 방식으로 단기 성과를 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적인 기업 가치를 높이려면 현재 보유한 자본이 신규 사업, 해외 시장 개척, M&A 등에 투자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정치권에서 논의 중인 상법 및 자본시장법 개정 논의도 마찬가지다. '주주 가치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대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주주라고 해서 다 같은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단기 차익을 노리는 외국인 투자자와 소액주주, 장기적 성장을 목표로 하는 대주주 간의 이해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정부가 금융 자본 논리에 치우쳐 산업 자본의 현실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영국이 금융 중심 국가로 전환하면서 제조업 기반을 잃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도 산업 자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금융 자본 논리에만 휩쓸리면 결국 경제 근간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ㅡ금융자본과 산업자본 간의 균형적 시각을 가져야 할 한국거래소(KRX)의 접근법이 틀렸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3월부터는 국내에서도 넥스트레이드란 대체거래소(ATS)가 등장한다. 기존의 거래소가 도입해야 할 선진제도가 있다면 무엇인가.
"물론 거래 활성화와 공시 효율화다. 한국거래소의 역할은 기업과 투자자 간 원활한 거래를 지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 자본시장은 거래 활성화를 저해하는 요소가 많다. 거래세 폐지나 인하를 고려해야 한다. 거래 수수료도 최소한으로 낮춰야 한다. 활발한 거래가 이뤄져야 주가 형성이 제대로 되고, 주가는 기업과 투자자들에게 중요한 정보가 된다.
또 국내 기업은 공시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주주총회는 형식적으로 진행되며 투자자들과의 소통은 미흡하다. 주주들은 회사에 투자했는데 정보를 몰라서 불안하다. 그 불안함을 낮춰주는 가장 쉬운 방법은 회사의 내용을 계속해서 알려주는 거다. 테슬라 같은 기업이 지속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기업이 보다 쉽게 공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공시의 중요성을 홍보해서 거래가 많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거래소가 해야 할 일이다."
ㅡ한국의 주가지수는 2500수준이다. 현재의 기업가치와 경쟁력이 동일하다고 볼 때 다른 모든 법적·정책적 측면이 지금까지 말씀하신 방향으로 구비된다면 주가지수는 어느 정도가 정상이라고 보시는지 궁금하다.
"최소 3200 이상이 정상적인 수준이라고 본다. 국내 기업의 주가수익비율(PER)은 평균 약 10배 수준이다. 미국 기업들의 평균 PER은 15~20배에 달한다. 만약 한국 기업이 미국처럼 혁신적인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최소 1.5배에서 2배까지 오를 가능성이 있다. PER이 상승하면 주가지수 역시 지금보다 큰 폭으로 상승할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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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어해설 : 주가수익비율(PER) 주가가 1주당 수익의 몇 배 정도 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인 PER은 주가를 주당순이익으로 나눈 값으로 '시가총액/당기순이익'이란 산식으로 구해진다. 주식가치는 본질적으로 해당 기업이 얼마나 많은 당기순익을 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생각 때문에 만들어놓은 지표인데 제조업이 정보통신기술업종보다 낮게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