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시간이 뭐길래"···K-칩법 심사 앞두고 이재명 말 바꾸기 왜?

野 노동시간 문제 별도 논의 필요 與 근로 시간 완화 없이 진행 불가 재계 "해외처럼 근무 효율성 높여야" 노동계 "예외 규정은 노동법 훼손"

2025-02-07     김성하 기자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오른쪽)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예방해 인사한 뒤 배석자들과 기념 촬영을 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다. /연합뉴스

글로벌 반도체 시장 경쟁의 핵심 키워드는 혁신(innovation)이다. 중국과 미국이 기술 패권을 앞다투는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여야가 '반도체특별법' 추진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법안 지연이 산업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7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오는 17일 소위원회를 열어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안(반도체 특별법)'을 심사할 예정이다. 12·3 계엄 정국으로 법안 처리가 지연되면서 지난해 통과가 예상됐던 반도체 특별법은 여전히 계류 중이다.

반도체 특별법 심사 지연의 핵심 쟁점은 주 '52시간 예외(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조항이다. 국민의힘은 해당 조항을 특별법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세제·재정 지원 등 합의된 내용만 우선 처리하고 근로 시간 문제는 추후 논의하자는 주장이다.

먼저 야당은 주 52시간제 적용 제외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위기가 연구개발(R&D) 직군의 노동 시간 부족이 아닌 다른 요인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경영계의 요구가 과도하다는 지적과 함께 주 52시간제 완화가 전체 근로기준법의 틀을 흔들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 3일 정책 토론회에서 "1억3000만원 이상의 고소득 연구개발자에 한해 유연성을 부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의견에 공감한다"며 수용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노동계와 당내 반발이 예상보다 거세지자 유보하는 태도로 선회했다.

민주당은 반도체특별법의 쟁점인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조항을 뒤로 미루고 여야가 동의하는 국가 지원 사안을 우선 처리하자는 입장이다.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장은 6일 기자간담회에서 "시급한 국가 지원에는 이견이 없으니 먼저 처리하고 노동시간 문제는 별도로 논의하자"며 "여당이 계속 반대하면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 지정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대표도 이에 대한 당내 의견 수렴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7일 더불어민주당이 주 52시간 예외 조항을 제외한 반도체특별법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핵심을 빼놓은 국민 기만극"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산업 현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조항인데 이를 제외한 반도체특별법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지적했다.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반도체공동연구소에서 연구진이 반도체 웨이퍼 표면을 검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도체특별법을 둘러싸고 노사 간 입장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재계는 R&D 인력의 집중 근무가 불가피한 만큼 일정 부분 주 52시간 근무 예외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미국은 당사자 합의와 초과수당 지급을 조건으로 연장 근무를 허용하며 일본은 월 100시간 이상 근무 시 건강검진 의무화 외에 별다른 제한이 없다. 대만도 월 최대 54시간까지 연장 근로를 허용하고 있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요구한 것은 반도체 업계뿐만이 아니다. 조선업계도 7일 국회를 찾아 첨단 선박 기술 R&D 인력에 대한 주 52시간 예외 적용을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석주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 전무는 "한중 간 기술 인력 규모와 친환경 선박 수주 기준을 고려해 조선 분야 R&D 인력의 주 52시간 적용 예외를 통해 근무 효율성과 미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노동계는 근로 시간 유연화보다 기술·인재 확보가 더 중요하다며 주 52시간 예외 적용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반도체산업이 우리나라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핵심 산업임은 분명하다"면서도 "산업이 위기에 처한 근본 원인은 글로벌 반도체 수요 급감, 미국의 자국 내 설비 투자 요구, 첨단 기술 및 핵심 인재 확보 미흡 등이 주요 요인"이라고 밝혔다.

특히 경실련은 "생산시설이나 재원 부족은 부차적인 문제"라며 "법정 노동시간 예외를 허용하는 것은 노동법 원칙을 훼손하는 것으로 논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특별법을 통해 노동시간 예외 규정을 마련하는 것은 노동법 취지를 무력화하는 조치이며 이는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강한 반발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치권이 반도체 특별법을 두고 거센 의견 대립을 이어가는 가운데 전문가는 주 52시간 근무 예외 조항이 한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여성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주 52시간 예외 적용이 반도체 산업에 일부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라며 "산업 경쟁력의 핵심은 기술 개발에서의 우위 확보이며 근로 시간 유연화보다 연구·개발 전략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반도체 공정은 일정이 촉박하고 연속성이 중요한 만큼 특정 시기에는 밤낮없이 근무해야 할 경우도 있다"면서도 "이런 경우 일부 인력만 근로 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할 필요는 있지만 주 52시간제 논란을 반도체 산업 경쟁력 문제의 본질로 보는 것은 다소 과장된 해석"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