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 더봄 ] 계약직으로 살기

[송미옥의 살다보면2] 고령 노인 취업이 서울대 합격보다도 어렵다는데 난 현 직장 재계약을 네 번이나 넘겨 알차고 넉넉 일자리 신청 동네 어른 네 분도 합격 통지서 받아

2025-02-09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부부로 살다가 헤어지는 아픔은 그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다. /픽사베이

지난해 건강하시던 동네 어른이 귀갓길에서 쓰러져 돌아가셨다. 갑작스레 남편을 잃은 부인은 두 계절이 지나도 문밖을 안 나오신다. 나도 부부의 이별을 겪어 봐서 알기에 그 깊고 깊은 공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겐 예정된 이별이었는데도 빈자리의 허전함과 허무가 나를 둘러싸고 시위를 하듯 했다. 종일 누워 자고 또 자도 잠이 오고 병명이 없는데도 온몸이 아팠다.

그렇게 홀로서기에 허우적대던 어느 날, 남편이 꿈에 나타나 알려준 일터엔 나의 수호천사가 되어 주실 분이 계셨다. 꿈에서나 이루어질 좋은 일자리를 얻은 것도 감지덕지한데 그분은 내게 일을 시켜보지도 않고 2년 계약은 어떠냐고 물었다. 당시의 나는 좋은 이름으로 프리랜서라 불리는 하루살이 일용 근로자였다. 2년이라는 긴 생활이 안정되고 쫓겨나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잔머리 돌리기는 부끄러웠지만 소심한 희망이었다.

요즘 도서관은 책만 읽고 빌려주는 곳이 아닌 만남과 토론, 교육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내가 하고 싶었던 일로 돈도 번다니, 무료하고 우울하던 마음이 바쁘게 허둥대고 표정도 달라졌다. 계약서를 쓴 후 집에 돌아온 나는 5년짜리 삶의 계약서를 나에게도 썼다. 5년만 산다 해도 멍청하고 뭣 같은 내 모습을 알뜰하게 바꿔서 살아보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직장의 재계약도 네 번을 훌쩍 넘기고 삶의 계약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재계약을 한 지 3년이 또 지나간다. 사는 동안 두 개의 계약을 얼마나 더 연장할는지 모르지만 계약직으로 사는 시간만큼은 알차면서도 넉넉하다.

지인들은 요즘 나에게 결단력, 추진력이 대단하다며 부추긴다. 소심한 A형이 대범한 O형으로 바뀐 것 같아 혈액검사를 해봐야겠다고 나도 장단 맞춰 너스레를 떤다. 참나, 생각해 보라, 계약 마감이 내일모레인데 우물쭈물할 시간이 어디 있나. 오늘도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나에게 딸이 한마디 한다. 신이 보시기에도 지금의 엄마 모습이 참 보기 좋아서 아마도 오래오래 무기 계약직이 되실 거 같다고···.

노년의 기적은 하늘과 물 위를 날고 걷는 게 아닌 땅 위를 두 발로 걷는 거라는데, 어르신 댁을 방문하니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종일 오도카니 앉아계신다. 망부석이 된 노인 이야기를 지어내 농담해 본다. 그러면서 기분 전환하게 노인 일자리를 신청하시라 하니 못 들은 척하신다. 토닥토닥하며 넋두리만 듣다가 나왔는데 저녁 즈음 지금이라도 일자리 신청을 할 수 있냐며 전화가 온다.

어르신 일자리 사업에는 등굣길 교통정리 및 꽃 가꾸기, 도로 환경 정비 같은 것도 있어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안전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신다. /픽사베이

일자리를 신청한 많은 분 중 2차 면접까지 통과한 동네 어른 네 분이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고령 노인 취업이 서울대 합격하기보다 더 어렵다며 서로 손잡고 흔들며 덕담하신다. 평균연령이 81세. 월급 30만원에 1년 계약직이지만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크다. 새 운동화에 새 옷도 사고 머리에 보글보글 파마도 하고 멋지게 염색도 하셨다.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건 언제나 흥분된다. 첫날은 교육도 받고 근무복도 받고 월급 받을 통장도 제출해야 하는 날이라 시내로 나가야 한단다. 그날은 마침 나도 약속이 있어 나가는 길에 모셔다드리기로 했다.

드디어 오늘 아침···. 먼저 시동을 걸어 놓고 따뜻하게 온도를 높이려고 차 문을 열다가 그만 울컥해졌다. 언제 오셨는지 꽁꽁 언 작은 차에 네 분이 병아리처럼 오종종히 끼여 앉아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시는 게 아닌가. 나는 엄지척을 하며 내년에 재계약도 거뜬할 거라며 추켜드렸다. 인간에게 노동이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힘이고 보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