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 더봄] 음력 새해를 맞아 나도 한번 뱀처럼 변화해 봐야겠다

[송미옥의 살다보면2] 미물인 뱀은 해마다 허물을 벗으며 새 삶을 사는데 인간인 나는 묵은해의 익숙함에서 못 벗어나다니

2025-01-26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뱀은 때가 되면 묵은 허물을 벗고 다시 상처를 입으면서도 변화의 시간을 충실히 살아낸다. 변화가 없는 삶은 살아있어도 죽은 삶이라고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뱀의 해라 그런겨? 어째 시간이 뱀 지나가듯 가는구먼.”

회관에 모여 노시던 한 어르신이 달력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신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일상도 곶감 빼 먹듯 흔적 없이 지나간다.

출근하여 마당을 돌아보는데 낙엽 사이로 잠자리 날개같이 투명한 뱀의 허물이 보인다. 어림잡아도 2m는 될 것 같은, 한 해에 한두 번은 실물로 만나는 구렁이의 허물이다. 내가 여기서 오래 일하는 이유가 어쩌면 남들이 기함하며 뒤로 나자빠질 뱀과 벌 같은 것들을 잘 처치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식 웃는다.

높은 산과 숲에 둘러싸여 유난히 곤충, 파충류가 많은 이곳 작은 도서관은 6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오래된 고택이다. 나는 고택 주위에 둥지를 틀거나 살 자리를 마련하려는 온갖 생물계에는 철천지원수지만 600년 고택의 수호신 같은 구렁이와 만나면 조상 대하듯 가던 길 편안히 지나가십사 기다려주는 품위 있는 집사가 된다.

뱀은 평상시엔 땅 위로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비가 온 후엔 바위 위에 척 늘어져 몸을 말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지하 세계도 우리네 삶이나 다름없이 치열할 것이다. 살아남은 미물은 때가 되면 묵은 허물을 벗고 다시 상처를 입으면서도 변화의 시간을 충실히 살아낸다. 변화가 없는 삶은 살아있어도 죽은 삶이라고 했다.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고 한다.

뱀은 일 년에 한두 번 허물을 벗는다. 허물 벗는 뱀 /게티이미지뱅크

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오래전 서울살이할 때 지인 중에 강원도가 고향인 남자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그의 초대로 깊은 산중 시골집을 방문했다. 다음 날 아침 버섯을 채취하러 뒷산에 올랐다. 우리는 등산화를 신고도 헉헉거리는데 그 남자는 슬리퍼를 신고 평지 걷듯 오르내렸다. 갑자기 산 중턱에서 꼿꼿이 고개를 쳐든 뱀과 마주쳤다.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했지만 그는 일상다반사인 양 유연하고도 날렵하게 들고 간 작대기로 뱀의 목을 누르고 발로 밟더니 한쪽 양말을 쓱 벗어 뱀의 대가리에 씌웠다. 뱀이 휙 돌아서 덤벼들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긴 몸통이 양말 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양말이 풍선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그때의 순간은 너무 생생하다.

인간과 함께 공존하는 생물 중 뱀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뱀도 족보가 있었다. 몸통을 기역자로 꺾어 쳐들고 혀를 날름거리며 쉭쉭 소리로 인간을 위협하던 모습, 작은 미물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여한다는 것, 그러나 어떤 힘 있는 존재라도 먼저 제압하고 통제하면 상대는 미미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는 그렇게 양말의 주둥이를 묶은 채로 소주에 목욕?시키고 다시 병으로 유인해 넣었다. 그러곤 독한 술을 붓고 밀봉하여 초 땜까지 하더니 낙수가 떨어지는 지붕 아래에 묻었다. (1980년대 어느 날의 일이다.)

올해는 더 새로운 모습과 행동으로 변화되기를 기원해 본다. /게티이미지뱅크

새해의 다짐이 무색하게, 변화보다는 편안하고 익숙한 게으름이 이어져 쌓인다. ‘지식은 더하기이며, 지혜는 빼기’라고 어느 책에서 말했다. 내 것에 더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빼기하는 지혜도 필요하다는 것을 뱀의 허물을 보며 느낀다.

또한 묵은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평안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준다는 거다. 새해에 세운 목표를 하나도 시작 못 했지만 아직 시간은 남아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기합 넣듯 중얼거리며 며칠 남지 않은 1월의 달력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