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웅익 더봄] 두물머리에서 마주하는 수평의 평온
[손웅익의 건축 마실] 심신의 치유가 필요할 때 찾아가는 곳 물결과 갈대와 안개에 잠긴 중첩의 산 마주하면 어느새 내 마음도 수평으로
나는 두물머리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몇 가지 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완행열차를 타고 두물머리가 보이는 북한강을 건넜던 적이 있다. 아버지가 다니시던 나염회사에서 두물머리로 야유회를 가던 날이었다. 그때는 열차 출입문도 없어서 난간에 매달려서 밖을 내다볼 수도 있었다.
다리를 건너 양수역에 내렸는데 어른들이 분주했다. 난간에 매달려 오던 누군가 강으로 떨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날 두물머리에서 아버지와 수영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평생 아버지와 수영을 같이 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두물머리를 다시 찾아가게 된 것은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다. 온 교정이 최루탄으로 뒤덮이던 1980년이었다. 건축과 동기 4명이 졸업 설계를 공동 작품으로 하기로 했다. 주제는 지금의 예술의 전당과 유사한 아트센터로 하고 부지는 두물머리 능내로 정했다.
현장답사를 하러 갈 때는 청량리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덕소 지나 능내역에 내려 두물머리까지 걸었다. 당시에는 마이카 시대도 아니었는데, 두물머리에 대규모 아트센터를 설계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러나 나는 동기들을 대표해서 지도 교수님 앞에서 확신에 찬 브리핑을 했고, 당당히 A 학점을 받았다.
그 해 제1회 서울·경기지역 건축과 연합 졸업작품전이 열렸는데, 학교 대표로 우리의 공동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때 보았던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두물머리의 잔잔한 물결과 강변에 무리 지어 흔들리던 갈대, 멀리 강 건너 안개에 잠긴 중첩의 산. 요즘도 두물머리에 서면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그 풍경과 마주한다. 능내역은 이제 폐역으로 남아있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흐른 1990년대 후반에 두물머리 인근 남한강 남측 강하면에 규모는 작지만 졸업 설계의 축소판 아트센터를 실제로 설계하게 되었다. 바탕골 양평예술관이었다. 건축허가를 진행하던 중 환경부에서 제동이 걸렸다. 환경부에서는 건축허가만 받고 예술관은 짓지 않고 땅장사를 하려는 투기 목적이 아닌지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술관을 지으려는 땅은 남한강 변 전망이 좋은 야산이었고 주변 여기저기에 숙박시설과 음식점이 생기고 있어서 개발허가가 나면 땅의 가치가 상당히 오를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건축주의 의지를 확신했기에 환경부 담당자를 만나서 몇 차례 설득도 하고 협박도 해서 허가를 받아냈다.
우여곡절 끝에 바탕골 양평예술관은 개관했고, 의미 있는 많은 공연과 전시를 했다. 개관하고 나서 자주 갔었는데 그 이후 뜸하다가 최근에 강하면 지방도로를 지나게 되었다. 분명 그 예술관 자리인데 예술관이 다 철거되고 원래대로 야산이 되어 있었다.
사연인즉 환경부에서 다시 매입해서 다 철거하고 원상 복구했다고 한다. 우려했던 대로 지방에서 개인이 문화 사업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건축설계를 하다 보면 유난히 애정이 가는 프로젝트가 있다. 바탕골 양평예술관이 그중의 하나다.
나는 요즘도 두물머리를 자주 찾는다. 두물머리에 가고 싶을 때는 회기역에서 경의중앙선을 탄다. 이 노선은 전부 지상철이라서 창밖 풍경을 감상하기에 제격이다. 팔당에 이르러서는 긴 터널을 지나는데, 터널을 빠져나가면 북한강의 장관이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북한강에 반영된 겹겹이 중첩된 산과 아치교가 아름다운 물의정원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남쪽으로는 양수대교 넘어 멀리 두물머리의 수평이 넓게 펼쳐진다.
서울에서 살면서 늘 수직과 마주하게 된다. 숨이 막히는 수직으로 꽉 찬 도시는 나의 생각과 마음도 늘 뾰족하게 세운다. 수직에 많이 지친 심신의 치유가 필요할 때 나는 두물머리에 간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잔잔한 물결과 강변에 무리 지어 흔들리는 갈대, 멀리 강 건너 안개에 잠긴 중첩의 산. 언제나 그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두물머리를 마주하면 어느새 내 마음도 수평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