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마디 더봄] 아라시야마, 인력거꾼 : 중심을 잡다
[윤마디의 유니폼] 중심 잡는 일은 움직이는 것 인력거를 끄는 내가 아니라 고객의 중심을 찾는 일이다
지난해 2월, <유니폼> 전시가 끝나고 다 같이 모여 소회를 나눌 때였다. 각자 작업을 어떻게 발전시킬지 얘기하는 자리에서 나는 솔직히 이 허술한 드로잉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한 작가님께서 검은색으로 단순하게 그린 무겁지도 않고 흐릿한 드로잉들이 자꾸 떠오른다고 하셨다. 그중에서도 가장 허술하게 그려놓았던, 완전하지도 않고 힘없어 보이는 인력거 바퀴 모양이 문득문득 떠오른다고.
내 몸집만 한 바퀴의 인력거를 붙들고 잡아끌려는, 내가 들리든 네가 들리든 해보자 하는 그 가운데서 중심을 잡는 한 사람을 나는 그렸었다. 그 씨름을 느끼셨던 걸까. 그때는 드로잉 이후에 이미지 아이디어를 만들어놓지 않았었는데, 나도 이 허술한 씨름이 두고두고 떠올라서 나중에야 글로 만들어본다.
8세기 말 일본에서는 나라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수도 교토에서 헤이안시대가 열렸다. 1868년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천도할 때까지 지속된 1000년 교토 시대의 막이 열린 것이다. 교토에서 서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아라시야마는 그때부터 귀족들의 별장지로 발달했으며 헤이안 문화를 꽃피운 자연 경관이 빼어난 마을이다. (아라시야마嵐山. 嵐은 산에 부는 바람,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뜻하는 ‘람’)
산 아래 강이 흐르는 아라시야마는 계절마다 변하는 풍경이 아름답고 특히 벚꽃, 단풍이 유명해서 성수기에는 가만히 있어도 인파에 떠밀려갈 정도라고 한다. 우리가 여행한 11월은 단풍은 이미 다 졌고 낮엔 햇살이 따뜻하다가 가끔 부슬비가 적셔주는 초겨울이었다. 그날도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며 교토에서 아라시야마까지 가서, 도게츠교를 건너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 초입인 강변길에서부터 사람들이 줄 선 가게들이 있고 대기 중인 인력거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인력거꾼이 입은 유니폼은 흰색 티셔츠와 검정 바지이다. 티셔츠 등판에는 아라시 嵐 한자가 붓글씨로 크게 박혀 있는데, 바지가 중요하다. 딱- 붙는다. 겨울이라서 긴 쫄쫄이가 대부분이었지만 가끔은 반바지, 핫팬츠라고 해도 될만한 반바지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 '지나갑니다~' 라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면 아차 하고 길을 피할 때 자연히 그들의 튼실한 달음박질에 눈길이 따라붙는다.
인력거 코스는 30분에 1인 9000엔, 2인 1만 엔. 그러니까 10만원이나 하고 호객을 하는 것도 아닌데 타는 사람들이 꽤 많다. 연세가 지긋하신 부모님과 함께 타거나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이 주로 탄다. 확실히 여성들이 많이 타는 걸로 봤을 때, 분명한 건 건장한 청년의 구릿빛 허벅지를 보면 나를 태우고 달음박질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력거꾼을 일본어로는 샤후(차부俥夫·しゃふ)라고 하는데 '부(夫)'는 ‘마부’, ‘인부’처럼 육체노동을 일컫는 직업을 뜻하는 접미사다. 인력거꾼은 말 그대로 몸으로, 육체의 강한 힘으로 차를 끄는 직업인 것이다. 하루 종일 궁둥이 붙이고 앉아서 하얀 벽만 쳐다보는 나와 반대편 세상에 사는 것 같아서 (모니터, 스케치북, 책) 저 구릿빛 몸에 자꾸 눈길이 갔다.
인력거 코스는 마을로 진입하는 도게츠교 다리에서 출발해 텐류지 절, 대나무숲 치쿠린을 지나 전통 상점 거리와 마을 길을 돌아보는 여정이다. 인력거꾼이 가이드가 되어 직접 명소와 마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진도 잘 찍어준다.
관광상품 사이트에서는 인력거를 타고 헤이안시대처럼 귀족 체험을 해보라고 홍보한다. 헤이안 시대 그림을 찾아보면 화려함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금실은실 자수가 빼곡한 비단옷을 스물다섯 겹이나 겹쳐 입고 윤기 나는 긴 머리까지 차르르 늘어뜨리면 사치에 겨운 오브제 자체가 될 것만 같다.
그럼, 이 짧은 시간 동안 어떤 지점에서 귀족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걸까. 사람을 부리는 기분? 30분에 10만원이라는 비싼 가격을 턱턱 내는 기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높은데 올라앉는 데에서 그 기분이 온다.
인력거를 타면 체감상 사람들 키만 한 높이에 앉아 있는 것 같다. 한 단 높은 자리에서는 인간군상을 내려다볼 수 있다.
나 혼자서 가만히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던 때가 떠올랐다. 광화문에서 일할 때는 사원증을 맨 대기업 공기업 직원들이 점심시간 그 짧은 시간에 밥 먹고 짬을 내서 커피를 사 들고 청계천 산책까지 하고서 회사로 들어가는 모습을 구경했다.
문래동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는 좁은 골목에 이웃한 이런저런 작은 공장에서 들리는 철근에 쇠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우리 가게에서 접시 달그락거리는 소리 사이로, 작은 테이블을 비집고 들어와 앉아 소담을 나누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라시야마에서 높은 의자에 올라앉으면, 예쁜 옷을 차려입고 잘 가꿔진 자연에서 노니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을 볼 수 있다. 달콤한 간식을 입에 넣고, 인연을 바라보며 키득 키득거리기도 하고, 서로의 웃음을 사진에 찰칵 담아준다. 그렇게 금방 휘발되는 즐거움에 지갑을 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치쿠린에는 잘 깔린 인력거 전용 길이 있어 바퀴는 무리 없이 굴러간다. 그러나 인력거는 기본적으로 지렛대의 모양이라 인력거꾼이 수레를 조금만 올려도 뒤쪽의 차는 크게 내려가게 된다.
안락한 승차감을 유지하기 위해 인력거꾼은 달리면서도 두 팔의 각도를 미세하게 조정하며 중심을 잡는다. 오르막길에서는 차가 뒤로 넘어가지 않게 숙여서, 내리막길에서는 앞으로 쏠리지 않게 들어 올려서, 작은 커브가 반복되는 좁은 대나무 숲길을 통과할 때는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게, 물가에 잔잔하게 늘어선 집들을 지날 때는 흐르는 물 따라 풍경이 펼쳐지게 인력거를 끈다. 고객을 모시는 일에서 중심은 고객의 중심이다. 그리고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언제나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 무게 중심에서 관광객은 인파에 떠밀리지 않고, 눈앞에 상대방 등짝이나 발만 쳐다보지 않고, 사시사철 오색으로 흘러가는 아라시야마의 산등성이를 바라볼 시간을 얻는다. 이 풍경 속에서 한 사람의 섬세한 배려를 받는 것이 바로 귀한 대접을 받는 기분일 거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