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가장 싫어하는 약, 90개국 중 한국만 없다
세계 90개국 사용 중 유산 유도제 '미프진' 안전성·효과 입증, 형법 개정 핑계로 지연 일부 단체 "여성 건강권 보장 위해 도입"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한국은 더 이상 낙태를 형법적으로 처벌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체계적 지원은 여전히 미비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논란은 유산 유도제, 일명 '미프진'(Mifegyne) 도입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필수 의약품으로 지정하고 90개국 이상에서 사용 중인 이 약물은 한국에서만 도입되지 않고 있다.
3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미프진은 1988년 프랑스 제약사 루셀 위클라프가 개발한 약물이다. 초기에는 RU-486이라는 개발 코드명으로 불렸다. 태아의 착상을 방해하고 임신을 종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약물은 9주 이내 초기 임신 중지에 매우 효과적이며 성공률은 95~98%에 이른다. 세계보건기구는 이 약물을 2005년부터 필수 의약품으로 지정하며 안전성을 인정했다.
팬데믹 동안 병원 방문이 어려운 상황에서 유산 유도제는 여성들에게 중요한 대안으로 부상했다. 캐나다, 미국 등은 이미 약물 임신 중지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며 여성들이 집에서 안전하게 약물을 복용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약물 임신 중지가 전체 임신 중지의 63%를 차지할 정도로 보편화됐다.
논란의 중심은 한국 정부의 소극적 태도에 있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19년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 미프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허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형법 및 모자보건법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전문가는 여성경제신문과 통화에서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라고 했다.
미프진 도입에 반대하는 일부 단체는 이 약물이 낙태를 지나치게 ‘손쉽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국제적 통계와 과학적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세계적으로 미프진은 진통제보다도 부작용 발생률이 낮은 안전한 약물로 평가받고 있다.
미프진 도입 논란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집권 당시, 임신 중단권을 제한하려는 강력한 움직임이 있었다. 트럼프는 1기 행정부 당시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사실상 박탈했다. 이 과정에서 유산 유도제 역시 강한 규제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미국 여성들은 미프진을 적극적으로 비축했다. 비영리단체 에이드 액세스(Aid Access)는 최근 트럼프 당선 확정 후 단 하루 만에 5000건 이상의 배송 요청을 받았다고 밝혔다. 여성들이 자기 결정권을 위해 얼마나 강하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현재 한국에서는 미프진 도입이 막혀 많은 여성이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 약물을 구매하고 있다. 정품이 아닌 약물을 복용하거나, 올바른 사용법을 알지 못해 부작용을 겪는 사례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약물 접근 지연은 여성 건강에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익명의 전문가는 여성경제신문에 "미프진 도입은 단순히 허가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며 "가격 책정, 처방 및 복용 조건 등 체계적 제도가 함께 마련되어야 여성들이 안전하게 약물을 이용할 수 있다. WHO는 불필요한 장벽을 없애고 임신 중지권을 보장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미프진은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 결정권을 상징하는 약물"이라며 "한국이 이제라도 세계적 흐름에 발맞춰 미프진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90개국 이상이 인정한 약물이 한국에서만 금기시되는 현실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