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어쩌다 한 달, 이탈리아 (4)-수사(Susa)와 프란체스제냐 순례길

[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수사(Susa) 태양과 설산의 뜨거운 입맞춤 산티아고보다 오래된 순례길, 프란체스제냐 노발레스의 수도원, 엄숙한 명이나물

2025-01-02     박재희 작가

(지난 회에서 이어짐)

모처럼 나타난 태양이 눈을 덮어쓴 봉우리에 쉬지 않고 입을 맞춘다. 스파크가 튀듯 반짝이던 빛이 폭포처럼 길을 따라 쏟아져 내렸다. 

“나는 아무래도 나무처럼 광합성을 하는 것 같아. 햇빛을 받으니까 등줄기를 타고 발끝까지 에너지가 채워지는 느낌이야. 광합성이 아니라면 다른 걸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구.” 기분이 좋아 던지는 흰소리에 오늘은 누구도 면박을 주지 않았다. 광합성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건 분명하다. 해가 나면 인간의 목소리가 커지고 보폭이 넓어진다.

수사(Susa)는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Piemonte) 지역에 있다. 인근 북서부지역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오는 전략적인 위치에 해당한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고대 도시, 인근 토리노(Torino)나 아오스타(Aosta) 같은 도시가 건설되기 전부터, 철기시대에 유럽 전역에서 번성했던 켈트족의 문명 흔적이 발견되는 지역이다.

알프스 지역 켈트족은 로마제국이 이탈리아 북부를 정복하기 전까지 강력한 존재감을 자랑했으니 로마와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수사 계곡은 켈트족의 제사 의식이 행해지던 중심지였다는데 오늘날은 그 모습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수사(Susa) 계곡은 고대부터 유럽 북서부 지역에서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중세 순례길의 중심지였다. /사진=박재희

상쾌함 최대치의 청량함으로 활짝 갠 아침, 이틀 내리 비가 씻어 내린 공기는 달디달다. 오래된 도시의 좁은 골목길을 걸어 대성당으로 향한다. 유럽의 큰 도시든 작은 마을이든 여행의 시작점은 성당이다. 기독교 문명에서 마을의 중심은 성당이고 성당은 중앙 광장에 있으니까. 도시의 크기에 따라 성당이 하나이냐 여럿이냐가 다를 뿐 성당은 상징으로도 위치로도 중심점이다.

당연히 수사도 11세기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사대성당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벽화로 장식된 파사드와 고딕 양식의 종탑이 유명한 곳이다. 수사대성당에 들어가 우리는 각자 여행을 시작하는 의식을 가졌다. 날라리라도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은 나는 오랜만에 짧은 기도를 했고 불교 신자, 무신론자인 후니와 미 선배도 잠시 앉아 다른 중심자를 향해 묵념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성당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다. 즉 성당은 가장 높은 존재가 작고 약한 존재의 기도와 제사를 받는 곳이다. 1000년 전에 성스러운 존재를 위해 지은 건물이고, 줄곧 간절한 바람과 아름다운 생각이 머물렀을 공간이니 어떤 형태로든 축복에 가장 가까운 곳이 아니겠는가.

중심 광장을 지나 오래된 성벽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조성된 오솔길에는 20세기 마을의 연대기 팻말이 이어진다. 세계 1차대전 전사자, 2차대전 중 실종된 노바라 주민들··· 길은 기억을 위한 팻말이 빼곡했다.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 분명한데 이름을 대하는 순간 구체적인 개별자로 다가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라진 20세기 언덕을 오르고 나면 고대하던 로마의 수사를 만날 수 있다.

“우와 이게 그 유명한 아우구스투스 개선문이구나.”

로마제국 최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개선문. 기원전 8~9년 /사진=박재희

생각보다 사이즈는 아담했는데 굳이 표현하자면 고상하다. 화려하지 않고 간결한 아치가 단정하게 서서 우리를 맞았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개선문은 총 4개뿐인데 그중 하나다. 아우구스투스가 알프스를 넘어 영토를 확장하면서 이 지역 부족들과 평화협정을 맺고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건립 연도가 기원전 9~8년, 로마에서 봤던 개선문들과 비교해도 최소 300년 이상 먼저 지어진 가장 초기 형태 아치 건축물이다. 처음부터 간결한 형태였는지 시간이 지나며 부조물이 사라져 지금의 모양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단순하고 간결해서 아름답다. 20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온 아치를 두들겨보고 안아보고 짚어보고 바라보며 한참 서 있었다. 

고대 로마 시대의 수사로 들어가는 개선문 뒤로는 로마제국 인증마크라고 할 수 있는 수로와 수도교가 있다. 커다란 두 개의 아치는 아직도 남아있어 2000년 전, 이 도시에 살던 사람들에게 목욕물을 나르고 도시의 분수를 채웠을 것임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지금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의 얼굴을 한 조각 분수 입에서는 물이 흐르고 있다. 상상의 고대도시를 떠올리며 중세 성벽과 문을 따라 걸으면 고대 원형경기장이 나온다. 역시 규모는 작다. 글래디에이터나 스파르타쿠스를 떠올리기엔 작은 사이즈라 다행이라는 미 선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니가 안내문에 번역기를 돌렸다.

중세의 흔적이 가득한 수사(Susa) /사진=박재희

“안정적인 평화 시대 1~2세기의 로마 시대 원형극장이다. 가장 인기 있는 쇼는 검투사 간 결투와 검투사와 동물들의 싸움 그리고 다음이 동물들 간 싸움이었다, 고 적혀 있어. 여기서 축구나 럭비를 한 건 아니라고.” 원형극장은 중세 시대에 채석장으로 쓰이며 버려지고 퇴적물이 쌓여 감춰져 있었다가 20세기에 다시 발굴했다. 죽고 죽이며 살이 찢기고 피가 튀던 쇼를 구경하던 곳에 앉아 우리는 살랑거리는 향긋한 바람을 따라 춤추는 꽃양귀비를 바라보았다.

“가끔 보이던 마크가 순례자 표식 같은데 뭘까?”

프란체스제냐 순례길 표식 /사진=박재희

“유럽 순례길은 산티아고 길 아냐? 그것 말고 다른 것도 있나?” 수사에서 자주 나타나는 순례자 표식이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라는 순례길의 표식이었다.

교황청이 있던 로마를 목적지로 가는 길로 원래는 영국 켄터베리에서 이탈리아 로마까지 이어지는 2000km 경로였다. 영국해협을 건너 프랑스를 지나 이탈리아 로마에 이르는 ‘프란치제나’는 ‘프랑스에서 오는 길’이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현대에는 유럽 북서부에서 이탈리아 로마를 향하는 경로를 의미하게 되었다. 프랑스 북부 평야와 부르고뉴 지역 포도밭을 지나 이탈리아로 연결되는 길, 스위스 알프스를 넘어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를 통해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길, 혹은 아오스타, 토스카나, 시에나 루카를 거쳐 로마로 가는 길이 주요 경로이다.  

수사 계곡이 옛날부터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연결하는 중심지였으니 순례길 표식이 자주 눈에 띈 것은 당연했다. 프란치스제냐 순례길 루트는 1994년 유럽 문화의 길로 지정되었다. 길을 따라 걸으며 지식, 언어, 종교의 끊임없는 교류를 만들 수 있는 유럽이 얼마나 부럽던지. 한반도는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에 속해 있으면서 분단으로 외딴섬 처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산티아고 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로마로 가는 모든 상인, 군대, 귀족, 모든 사람의 길이 된 비아 프란체스제냐. 일찌감치 333년부터 패스에 대한 기록이 있다니 대단하다. 언젠가 이 길을 한번 걸어볼까? 하는 위험한 꿈을 꿔 본다. 알면 보이고 생각하는 대로 보인다고 그 후로는 순례자표식, 순례 행렬의 그림이 어찌나 자주 나타나던지.

노발레스 San Pietro 수도원의 성모상 /사진=박재희

노발레사 수도원(Novalesa Abbey)을 찾아갔다. 거대한 목적은 없었고 사크라 디 산 미켈레(Sacra di San Michele)로 가는 길 동선에 있기 때문이었고, 비잔틴 시대 프레스코화를 보물에 비유하는 짧은 안내문 때문이었다.

사크라 디 산 미켈레야 워낙 유명한 신비 수도원이고 특히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으로> 집필에 영감을 얻은 장소라고 알려져 있어 처음부터 마음에 품은 곳이었지만 노발레사 수도원은 다소 즉흥적으로 정했다.

노발레사 수도원으로 가는 계곡 길은 구절양장, 정말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하니 운전하기는 까다롭고 힘겹다. 수도원은 해발 830m의 산중턱에 있다. 에밀레종이라고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을 열심히 주조하고 있던 시기 726년에 지은 수도원이다.

아무 정보도 없이 찾아온 수도원은 하필 보수 공사 중이다. 안뜰이 파헤쳐져 있고 안내를 받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고 철문이 닫혀있다. 담장 밖에서 아쉬워하며 프란치스제냐 루트를 조금이라도 걸어볼까 하는 찰나에 무거운 철문이 빼꼼 열렸다. 눈꼬리가 입꼬리와 닿는 스마일 표정을 짓는 수사님이다. 깨진 영어와 도무지 말도 되지 않을 이탈리아어를 동원해서 수도원을 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전하자 수사님은 손짓으로 들어오라는 시늉을 한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 수사 계곡의, 726년에 건립된 노발레스 수도원 /사진=박재희
노발레스 수도원에서 프란체스제냐 순례 루트 오르는 길 /사진=박재희

1300년이란 어떤 시간일까··· 통일신라 시대의 에밀레종··· 내가 어떻게 그 연대를 기억하는지 나조차 알지 못하겠지만 여튼 에밀레종의 시절부터 이곳에 있던 수도원에 들어왔다. 순례자들의 쉼터로, 기적으로 병자들을 치유하고 굶는 사람들을 모두 먹여 살렸다는 장소에 들어온 것이다.

예배당의 고요에 잠시 충격을 받았고 걸음을 옮기기도 조심스러운 정적 안에서 마주친 성모상은 내가 평생 만난 성모상 가운데 가장 아름다워 놀랐다. 에밀레종보다는 천년쯤 후에, 아니 마론인형이 미인의 표준으로 정해진 후에 오신 성모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완벽한 정적의 수도원 마당을 돌아 수사 계곡 폭포와 설산을 바라보며 걸었다. 산책로에 피어난 흰 꽃이 아름답다 했더니 미 선배는 “명이나물이잖아!” 한다. 

“여기 노발레스 성인 엘드라도께서 배고픈 사람을 먹인 풀이 혹시 이거 아니었을까?”

울릉도에서도 추운 겨울 명을 이어줘서 명이나물이라고 부르는 거니까 말이 되네 마네 하며 우리는 지천으로 깔린 산나물을 욕심껏 꺾었다. 성스럽고 신비한 고요의 노발레스만큼이나 구운 고기의 쌈이 되어줄 명이나물을 발견한 것도 좋았다. 무려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수사 계곡에 피어난 산나물, 명이나물이 아닌가 말이다. 명이나물을 꺾고 나니 성 미카엘 수도원보다 늦지 않게 돼지고기를 파는 집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잘 찾아야 해. 베이컨용 절인 고기 말고 생고기 파는 집!”

엄숙하게 내비게이션을 돌려 경유지를 등록했다. 아,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길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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