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가 좋아도 설계가 잘못된 '양곡관리법'···정부 역할 미흡 논란도

전문가 "중재 및 타협안 마련에 실패해" "쌀 20년째 과잉생산 다른 작물로 바꿔야"

2024-12-27     김민 기자
양곡관리법을 둘러싼 대립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정치권에서의 갈등으로 결국 농민들의 피해만 커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사진은 수매한 벼를 살펴보는 관계자의 모습이다. /연합뉴스

양곡관리법을 둘러싼 대립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정치권에서의 갈등으로 결국 농민들의 피해만 커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양곡관리법의 방향성은 옳지만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잘못된 상황에서 정부가 타협안을 제시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27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양곡관리법을 중심으로 한 야당과 정부 사이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9일 한덕수 권한대행은 국무회의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과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농안법), 농어업재해보험법, 농어업재해대책법 개정안 등 농업 관련 법안 4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양곡관리법은 남는 쌀을 정부가 매입하고 양곡 가격이 평년 가격 미만으로 하락하면 차액을 정부가 지급하도록 하는 법안이다. 야당은 농민의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고 식량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서 양곡관리법이 필요하다는 태도다. 

반면 정부와 여당은 "해당 법안이 재정 부담만 늘릴 뿐 쌀값 지지 효과는 없다"라고 비판했다.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 농가들이 다른 작물보다 농사짓기 편한 쌀농사에 몰려 쌀 공급 과잉 현상이 일어나고 이는 고스란히 정부의 재정 부담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양곡관리법을 둘러싼 대립이 계속되다 탄핵 사태와 맞물리면서 농민들의 시위도 격해졌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지난 21일 오전 9경 경기 수원시청에서 트랙터 35대와 화물차 60여 대를 끌고 한남동에 있는 대통령 관저로 시위하기 위해 출발했다. 경찰은 남태령 고개에서 차벽을 설치하며 이들의 진입을 차단했다. 시위대는 경찰과의 32시간의 대치 끝에 지난 22일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 퇴진 집회를 열었다.

지난 21일 윤석열 대통령 구속 등을 촉구하며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이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경찰에 가로막혔다. /연합뉴스

농림축산식품부는 양곡관리법 시행 시 오히려 쌀값이 더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여성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양곡관리법을 시행하면 쌀 생산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라며 "과잉 생산이 이루어지면 다시 가격이 내려가고 정부는 농부들의 차익 보존을 위해 이를 또 매입한다. 결국 재정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농업인들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관계자는 "20년 동안 쌀이 남아돌고 있다. 생산량을 줄일 수밖에 없다"라며 "국산 콩 등 가격이 비싼 작물을 생산할 수 있도록 타 작물 전환 시 보조금을 드리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관계자는 "농업인 중 많은 사람이 쌀농사를 짓다 보니 쌀에 대한 민감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쌀 농가의 소득이 안정돼야 한다는 민주당의 대의에는 동의하지만 양곡관리법이 아닌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농업 전문가들도 양곡관리법을 두고 방향성은 옳지만 구체적인 설계가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여성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우리 농가의 53%가 쌀농사를 짓는다"라며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건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법안의 구체성은 떨어진다"라고 평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부 역시 중재하고 타협안을 도출하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봤다. 임 교수는 "결국 일차적인 책임은 주무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에 있다. 정부가 농업법과 관련해 심층적인 분석과 논의를 하고 초당적으로 합의 가능한 대안을 마련해 여야 정치권을 설득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주장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지난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연합뉴스

그는 "쌀 대신 다른 작물을 재배해야 한다는 주장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만 방안을 두고 논쟁이 발생하고 있다"라며 "농부들이 다른 쌀 대신 다른 품목을 재배하려면 충분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라고 했다. 임 교수는 "거부권 행사가 반복될수록 농민들만 피해를 본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기후변화 등으로 쌀농사를 비롯한 여러 농업이 피해를 보았다. 지난 11월 19일 농촌경제연구원에서 발표한 '2024 가을 농업·농촌 경제동향' 보고서를 보면 지난 3분기(7~9월) 농가교역조건지수는 94.4로 2분기(95.7) 대비 1.3% 하락했다. 

교역조건지수는 농가가 생산·판매한 농축산물 가격(농가판매가격지수)을 농가가 산 농기자재·생활용품 등 비용(농가구입가격지수)으로 나눈 값으로 농가의 채산성을 나타내는 대표 지수다. 2020년을 100으로 봤을 때 100 이하면 농산물 판매가격이 농사를 짓기 위해 산 물품값보다 낮아 밑지는 농사를 지었다는 의미다.

하원오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여성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기후 위기로 배춧값이 1만원원이 넘었지만 실제 농민에게 오는 수익은 1000원정도"라며 "배춧값이 1만원이 되면 수요가 급감해 농가만 피해를 본다"라고 말했다. 하 의장은 "많은 농가가 피해를 보았지만 아무도 그 부분에는 주목하지 않는다"라며 씁쓸함을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