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노인 촌이 된 고시촌···청년 떠나고 중장년 몰렸다

대학동 고시촌 지역 슬럼화 아랫마을엔 7년 전 고시생 윗마을은 가난한 장노년층 "작은 허브 공동체 만들어야"

2024-12-26     김정수 기자
26일 여성경제신문이 서울시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을 찾았다. 고시원, 미니 원룸, 원룸 등으로 이뤄져 있으며 월 15~30만원 이내다. /김정수 기자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청년으로 가득했던 고시촌. 옛말이 됐죠. 이젠 '노인 촌'으로 불려요. 제 옆에 있는 친구는 어느덧 60대를 바라보는 중년이 됐어요. 10년 뒤엔 독거노인이 되겠죠. 더 나이 들기 전에 쭉 유지할 수 있는 사회관계망이 절실해요."

2017년 사법고시가 폐지되면서 갈 곳 잃은 고시생들이 고시촌에 남았다. 코로나 이후 실직, 가족과 단절, 가난 등의 이유로 이곳을 찾은 사람들도 있다. 이젠 중장년이 되어버린 고시생은 '아랫마을'에 기거한다. '윗마을'은 저렴한 집세와 생활비를 찾아온 중장년, 노인 등 사회적 약자의 삶터가 됐다. 대부분 생활고를 겪고 있는 1인 가구다.

26일 여성경제신문이 서울시 관악구 대학동을 찾았다. 이곳 고시촌에선 고립된 주민들을 위한 시민단체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독거 중장년 주민들과의 관계 형성에 힘쓰고 있는 길벗사랑공동체 해피인의 박보아 대표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대학동 고시촌 주민들이 해피인에서 식사 지원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해피인 제공

박보아 대표는 지난 2017년 대학동에서 무료 식사를 지원하는 길벗사랑공동체 해피인을 설립했다. 대학동 고시촌 언덕길 중간쯤 자리 잡고 있다. 식사 지원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와 연대해 주거, 의료, 일자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2020년에는 해피인 카페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고시촌 주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주거 상담, 운동, 공동체 활동 등이 이뤄진다. 현재 당사자 자조 공동체 '윗말주민협의회' 조직을 운영하기도 한다.

해피인 카페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는 고시촌 주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이 있다. 지난 20일 오후 3시경 방문한 해당 공간에서 50대 남성 주민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김정수 기자

"고립된 1인 가구와 만날 중간 매개체의 필요성을 느꼈어요. 대학동 일대는 전국에서 자살률과 고독사가 높은 지역 중 하나죠. 하지만 어디서 어떤 사람이 고독사하게 될지 알 길이 없었어요. 고독사 위험군 대상자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과 관계망 구축을 위해 해피인을 설립했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따뜻한 밥을 나눠주면서 이야기를 나눈 지 7년, 하루 2~30명 오던 해피인은 지금 150명이 방문해요."

해피인은 2021년부터 안부 앱을 개발해 방문자들의 데이터를 모아 관리하고 있다. 앱을 통해 해피인 출석 여부, 방문하지 못한 이유, 자신의 건강 상태 등을 체크하는 식이다. 등록자가 미 출석 시 연락하거나 건강 상태가 안 좋게 나올 경우 연락해 안부를 확인한다.

해피인은 2021년부터 안부 앱을 개발해 방문자들의 데이터를 모아 관리하고 있다. 앱을 통해 해피인 출석 여부, 방문하지 못한 이유, 자신의 건강 상태 등을 체크하는 식이다. /해피인 제공

2021년 10월부터 실시한 안부 앱에 등록된 인원은 600여 명이다. 해당 데이터에 따르면 4~60대 비율이 73.8%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2~30대는 15.1%, 70대 이상은 11.1%다. 65세 이상은 전체 21%다. 박 대표는 방문자 10명 중 8명은 1인 가구이며 노인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2~30대는 대부분 수험생으로 시험이 끝난 후 떠날 인구라면 중장년층은 고시촌에 쭉 거주하는 사람들이에요. 코로나 전 이 지역 고시원은 잠만 자는 방이었어요. 삼시 세끼는 식당 가서 먹고 도서관에 있다가 밤늦게 들어가는 거죠. 고시생들이 떠나고 나니 이 지역이 슬럼화되면서 취약계층이 몰려오기 시작했어요. 서울역 쪽방보다도 방값이 5만원 더 싸기 때문이죠. 고시원부터 원룸까지 15~30만원 이내에요."

대학동 고시원 외관 모습. 창문 하나당 방 하나다. /김정수 기자

고시촌의 슬럼화는 중장년층 고립의 심화로 이어졌다. 박보아 대표는 해피인이 단순 식사 지원 공동체가 아니라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료 급식이라는 수단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고 고독사 예방의 단초를 만드는 거예요. 절대 도시락을 집까지 배달해 주지 않았어요. 나와서 햇빛을 보고 여기까지 오는 게 내적 힘이거든요. 11시 반이 되면 해피인 앞은 일찍부터 줄을 선 주민들로 가득해요. 한분 한분 건강 상태나 안부를 묻기 시작하니 다음에 또 오셨을 때 병원에 갔다 왔는지, 오랜만에 방문했다면 왜 그동안 안 왔는지를 물으면서 관계가 깊어졌죠."

고시촌에서 수십 년 거주할 고립된 이들에게 필요한 건 결국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 그리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게 고독사 예방의 핵심이라고 박 대표는 말했다.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과 같은 처지인 당사자, 주민이다.

윗마을협의회 회원이 같은 윗마을 주민 방에 방문해 안부를 확인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해피인 제공

"척추 수술 후 매 순간 통증에 시달려 해피인에 못 나오는 분이 계셨어요. 또 다른 해피인 이용자가 그 분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줬어요. 같은 해피인 이용자니 서로 친밀감과 익숙함이 있었겠죠.

이전까지는 정부 차원에서 '이웃 살핌이', '이웃 돌보미' 등이 있었어요. 대부분 전화로 안부를 체크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거부감을 드러냈죠. 진정한 마음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고립된 1인 가구에게 '전문가'란 같은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라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당사자 돌봄을 시작했습니다. 함께 산책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집 안을 청소해 주거나 시장을 같이 가는 주민 조직을 만들었어요."

주민 조직 이름은 '윗말협의회'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갈수록 험한 집들이 있어요. 흔히 '윗마을'이라고 부르죠. 조직을 만들 때 주민들이 우린 윗마을 주민이니 윗마을로 이름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협의회 등록된 사람들은 40명 이상, 활동하는 주민은 30명 정도에요."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의 가파른 언덕길. 이곳에서 50대 남성 A씨를 만났다. 현재 윗말협의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김정수 기자

이날 취재진은 고시촌 언덕에서 50대 남성 A씨를 만났다. 5년 전 이혼으로 가족과 단절되면서 고시촌으로 들어온 주민이다. 박 대표는 그에 대해 당시 자살 시도를 했던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2019년부터 해피인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현재 윗말협의회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러한 주민 조직 등 시민단체 차원의 중장년층 고독사 예방 관리가 돋보이면서 복지부, 지자체 등에서 벤치마킹을 시도했지만 정책은 나아진 게 없는 실정이다. 민간단체인 길벗사랑공동체 해피인은 공모 사업에 지원해 사업을 따야지만 재원이 생긴다. 그간 확보된 사업비는 올해까지로 내년부터는 예산이 없다. 작은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정부·지자체의 예산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고독사 예방 관리를 위해선 작은 허브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정부 정책은 복지관 중심으로 가게 돼 있어요. 큰 복지관에 지원금을 주고 거기서 사업을 구성하도록 맡기는 식이죠. 복지관도 필요하지만 고독사 위기에 처한 가구를 발굴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찾아내기 위한 후보 공동체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전문가보다 당사자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해요.

지난 20일 오후 4시 30분경 대학동 고시촌 맨 꼭대기에서 바라본 전경. /김정수 기자

관악구는 청년 인구가 굉장히 많아요. 국가 차원의 정책은 청년을 대상으로 한 사업이 많죠. 정작 취약계층이 대부분인 중장년 대상의 사업은 없어요. 청년들은 쉐어하우스 등을 통해 사회적관계를 형성할 기회가 많아요. 하지만 장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쉐어하우스는 없잖아요.

윗말협의회를 운영해 보니 안될 건 없다고 느꼈어요. 단지 수단이 없었을 뿐이죠. 지금 이 고시촌 중장년들은 여기서 쭉 거주할 사람들이고 10여 년 뒤엔 노인이 되겠죠. 이제는 이들을 위한 관계망을 구축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