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 더봄] 이것은 축제인가, 대란인가?

[송미옥의 살다보면2] 백수를 바라보는 호순 어르신네 김장 날은 동네 할머니들의 참전으로 온 동네 축제일 삶아 낸 수육값만 수십만원이 넘었다는···

2024-12-15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아직도 농촌에선 김장을 해야 한 해의 마무리가 끝난다고 생각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번 주는 우리 동네가 엄청 바쁘다. 나라가 어수선하든 말든 12월에 매듭을 지어야 하는 주 과제 중 하나가 김장이기 때문이다.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오래 사신 어르신들의 노래도 이맘때면 꼭 되풀이된다.

백수를 바라보시는 호순(가명) 어르신 댁 텃밭 배추가 옹골차다. 며칠 전부터 단단해진 배추를 똘똘이(바퀴가 달린 작은 수레)로 조금씩 나르신다. 트럭 가진 이가 한꺼번에 옮겨 드리려 하니 운동 삼아 하는 거라며 손사래를 치신다. 며칠 새 만리장성같이 쌓아졌는데 아마 200포기는 넘을 거라며 수군거린다.

새벽 출근하듯 나오셔서 회관 안팎을 청소한 후 밭을 한 바퀴 둘러보고 들어갈 때쯤이면 여명이 서서히 밝아온다. 그렇게 어른의 하루가 시작된다. 자세도 매무새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고 말도 없으시니 모두에게 존경받는다. 매주 금요일 하는 어르신을 위한 인지 수업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신다.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는 나물 가꾸기와 채취하기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근처에 사는 그분의 며느리는 일부러 자잘한 일거리를 만든다. 어른이 가장 좋아하는 일인 텃밭을 가꾸게 하고 봄이면 나물도 뜯고 고사리도 꺾으며 함께 여행도 자주 다니신다. 며느리는 회관에 모여 노시는 어른들을 위해 많은 먹거리와 생필품 등을 기부하신다. 정말 존경스럽다. 항상 부지런한 어른을 보며 건강한 장수 비결을 배운다.

호순 어른 댁 김장 전날, 젊은 노인 도우미들이 회관에 죽 둘러앉아 양념에 넣을 쪽파 마늘 무 등을 씻어 줄 세우고, 한쪽에선 마늘 까고 한쪽에는 무채 썰며 떠드는 수다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렇게 쌓인 수다는 동네의 역사가 된다.

“때마다 얌통머리 없이(염치없이) 통만 들고 와서 담아 가는 내 딸년은 예쁜 겨? 밉상인 겨?”

“허허, 앞치마 입고 설치는 온달 같은 우리 아들은 어떻고?”

도마에 오른 이 중에도 호순 어른 댁 며느리는 이구동성 최고 점수를 받는다. 그녀는 칠남매 형제들의 대장이다. 툭하면 투덕거리는 형제들을 손잡게 하고 명절이나 김장 날이면 축제인 양 온 형제가 앞치마까지 때깔 나게 맞춰 입고 나타나 어머니를 웃게 만든다. 어른의 얼굴에 비치는 소박하고 겸연쩍은 미소는 모두의 부러움을 산다.

한국인의 친숙한 맛 묵은지 찌개는 우리의 입맛을 다시게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수다 중에, 이젠 나이 들어 힘드니 내년부턴 김장배추를 심지 말자는 전략을 시작으로 김장 안 할 온갖 이유가 성토되고 발의된다. 떠들다 보니 배가 고프다. 누군가 주방에 들어간 잠시 후 시큼한 향이 침을 고이게 한다. 묵은지찜이다.

통김치 죽죽 찢어 햅쌀밥에 척척 걸쳐 먹으니 김장을 못 하겠다는 굳은 전략과 계획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배가 부르면 모든 게 평화로워져서 바쁜 핑계로 돈만 보내는 아들놈도 통만 들고 나타나는 밉살맞은 딸자식도 살아 있는 자 모두가 자랑거리다.

드디어 김장 날이다. 며느리의 진두지휘에 전날부터 와서 배추를 손질하고 소금에 절이는 일을 맡은 선발대는 아침 일찍 배추를 씻어 건져 놓고 후발대를 기다리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눈다.

회관 앞마당 주차장엔 어른의 자손들이 타고 온 차들이 줄을 잇고 마지막으로 갓 결혼한 증손자 부부가 아기를 안고 내리니 우르르 달려 나와 환영한다. 앞치마에 고무장갑으로 무장한 뒷골 할머니의 사륜오토바이까지 주차하니 도우미를 자청한 젊은 노인들도 하나둘 고무장갑을 흔들며 출정한다.

김장 당일 삶아 낸 수육값만 수십만원이 넘었다는, 이것은 김장인가? 대전인가?

세상은 요지경이라지만 맛과 색이 전혀 다른 양념들이 만나 한 맛으로 어우러지는 김장 김치처럼 어수선한 이 세상도 그랬으면 좋겠다. 옹기종기 모여 치르는 우리 마을 김장 대전은 올해가 마지막이란 노래가 무색하게, 사는 날까지 주욱 이어질 전통 문화축제다. 두 손 벌려 마중 나오는 호순 어르신의 발걸음이 새 걸음 같이 가볍다.

(이웃에서 건네준 가지각맛? 김장 김치 선물에 이 글로 감사 인사를 대신한다.)

대가족이 모여 사는 시절도 지나갔지만 대가족이 화합하는 모습도 드물어졌다. /게티이미지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