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어쩌다 한 달, 이탈리아 (3)-그라베레, 알프스 시골 마을

[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인류애적 사랑과 지구 평화 그리고 피자 배가 너무 고파 죽거나 너무 불러 죽거나

2024-12-19     박재희 작가

(지난 회에서 이어짐)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야.”

“아까는 배가 불러서 터질 지경이라더니."

“빨리 숙소로 가자. 뭐라도 있겠지.”

배가 너무 부르거나 너무 고프거나. 무슨 조화 속인지 적당할 때가 없다. 차창에서 와이퍼가 뻑뻑한 신음 소리를 낼 정도로 쏟아지는 비를 뚫고 달렸다. 우산도 제대로 펼 수 없을 만큼 퍼붓는 비를 맞으며 휴게소에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 흔하던 과자 주전부리마저 없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세 가지에 대해 한 번 얘기한 적이 있던가? 인류애적 사랑과 지구 평화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라고. 지금 맛은 고사하고 씹을 것조차 없으니 허기가 더 심해지는 기분이다.

배가 고파 난폭해진 매우 위험한 상태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연결하는 프레쥬스 터널을 지났다. 메인 도로 SS24로 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알프스 마을 그라베레(Gravere)로 목적지를 정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비에 텐트를 칠 수는 없어 캠핑을 포기하고 황급히 예약 애플리케이션을 돌려 숙소를 찾는다.

"복층 구조의 산장이고 3베드, 침대 세 개에 아침 식사 포함 가격 90유로.” 미 선배가 찾은 숙소는 최고의 선택지였다. 무엇보다도 가까운 데다 그 정도 가격이면 로또급이니까. 

그라베레의 산장 입구에 도착하고 차 문을 여는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숲 내음이 끼쳐온다. 빗줄기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가 숲에 있다는 실감이었다. 

짐을 내리면서 놀랐다. 새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맹렬하다. “비가 오는데 어디서 새가 울지?” “그렇긴 한데 비가 온다고 새가 못 우는 건 아니잖아” 이런 흰소리를 하면서 우리는 적잖이 흥분했던 것 같다. 숲 내음에 새소리는 피톤치드가 넘실거리며 팔뚝과 다리, 콧속으로 흘러들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으므로. 빗속 운전으로 지쳐 누렇게 변한 우리를 다시 초록초록하게 만들고 있었으므로. 

북부 이탈리아 알프스 마을의 숙소, 비 내리는 그라베레(Gravere) /사진=박재희

간단한 주전부리 하나 없는데 식당 저녁 오픈 시간은 7시 30분이라고 한다. 세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 대체 이탈리아 사람들은 저녁을 왜 이렇게 늦게 먹는지. 허기도 잊을 겸 산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우산 활이 휘도록 들이붓는 비가 심란했다. 손가락을 빨며 산장 테라스에 앉아 얼마나 있었을까? 그칠 것 같지 않던 빗줄기가 가늘어진다 싶더니 땅으로 쏟아지던 빗물은 안개가 되어 산을 기어오르고 있다. 

“<여덟 개의 산>이라는 영화 봤어?”

미 선배가 천천히 걷히는 산자락 능선을 따라 손가락으로 선을 이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에 나오는 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닮았다. 영화에서 나오는 마을 정도로 오지 마을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영화의 배경도 이탈리아 알프스 마을이었어. 분위기가 비슷한 건 당연하지.”

도시 소년 피에트로와 산속 마을 소년 브루노 그리고 피에트로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영화는 아름답던 장면과 함께 깊은 감동으로 남아있다. 단지 숙소를 찾아 들른 마을에서 영화를 떠올리게 되는 경험이라니. 기분이 좋아진다. 자연은 말하지 않고도 깨우치게 하는 힘이 있다.

산을 오르며 자신의 삶과 길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서사는 힘이 있고 충만하다. 존재만으로 저절로 충만해지는 산을 마주하니 허기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우리는 장엄한 알프스에 매료되었지만 여전히 꼬르륵거리는 위장에 넣을 것이 필요했다. 일단 식당에 가서 앉아 있기로 하고 산장 주인에게 식당 위치를 물었다. 

숙소 주인이 직접 깎아 사용하는 나막신 /사진=박재희

“길을 따라 내려가요.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보일 거예요.”

“식당 이름이 뭐예요?”

“이름? 뭐더라··· 식당은 그거 하나라. 이름은 모르겠네요.”

과연 간판을 언젠가 달았다가 없앤 건지, 언제부터 식당이었는지 모를 집이 하나 보인다. 동네에 누구라도 식당으로 떠올리는 유일한 곳. 영업을 시작하기 전이지만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식사 시간을 기다리며 와인이라도 마실 요량이었다. 번역기가 우리의 절박한 허기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물었다.

“배가 너무 고파요. 무엇이라도 좋으니 와인과 함께 먹을 것을 주문하고 싶어요.”
“주방은 아직 준비 중입니다. 식사는 불가능합니다.”

좌절하는 우리 얼굴을 마주하고 웃던 남자가 말했다. “피자는 구울 수 있는데 피자도 괜찮아요?”

아니 이럴 수가. 피자는 요리가 아니라는 말씀? 피자는 요리 따위가 아니라는 말이 이렇게 감사할 줄이야.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먹고 싶은 게 피자였다. 번역기의 은총을 받아 그러니까 그에게는 요리가 아닌, 우리가 제일 원하는 피자를 주문했다. 여기서 피자 하나 크기는 성인의 양 팔을 둥글게 이어 사이즈를 정하는 걸까? 정말 크다.

1인 1 피자가 기본이니 세 개 주문한다. 테이블을 가득 채우는 사이즈의 피자를 세 개에 와인까지 충분하고도 행복한 저녁 식사를 했다. 배가 너무 고픈 문제 상태에서 배가 너무 부른 문제 상태로 옮겨온 것이다.

그라베레 1인 1피자, 지름 50cm쯤 /사진=박재희

그라베레의 아르노데라 마을에서 우리가 받은 축복을 따져보자면 잘 먹고 잘 씻고 잘 잔 것이다. 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에 있었으면 당연했을 것들이 나오면 축복이 된다.

알프스의 기운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꿀잠이라는 단어의 감각이 콕 새겨진 날 아침이었다. 해가 뜰 무렵 새소리로 산장 유리창이 모두 깨지는 줄 알았다. 새들은 세상을 깨우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소리를 질렀다.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떼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얼마 만에 보는 햇살인지 눈 부신 해를 맞으며 서로를 쳐다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통통 튀어 오르는 기분이었는데 그 넘치는 기쁨의 이유를 설명하기란 힘들다. 오랜만에 나타나 준 햇살 때문이었을까, 설산을 마주하며 맛있는 커피와 집에서 구운 빵을 먹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바싹 잘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기 때문일지도. 몸과 마음이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여행의 신 헤르메스 신발 뒤축에는 날개가 달려 있대. 모자랑 아마 지팡이에도 날개가 있을껄.”

아침부터 너무 텐션이 높다고 주의를 준 신중파 미 선배에게 어쨌거나 몽글몽글한 기분 방울을 꺼트리고 싶지 않은 나는 헤르메스를 소환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고 헤르메스라도 된 거냐 묻는다면, 뭐 굳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해두겠다. 

운전하는 후니도 차에 앉은 우리도 모두 창을 열 수 있는 만큼 열고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몸을 빼내며 해바라기를 했다. “네가 찾고 있는 답은 산 위에 있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가야만 알 수 있어." <여덟 개의 산> 영화에서 피에트로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했던 말을 떠올린다. 우리가 찾는 답은 여행길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떠나야만 알 수 있다. 오늘은 캠핑을 할 수 있겠다. 드디어 비가 갰으므로.

영화 '여덟 개의 산' 풍경을 연상시켰던 숙소의 밤 /사진=박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