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심 더봄] 사가현 '열기구 페스타'···이마리에서 우연히 만난 것은?
[양은심의 일본 열도 발도장 찍기]( 31) 2024 SAGA INTERNATIONAL BALLOON FIESTA 보이지 않는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는 열기구 신비의 도자기 마을 이마리에 '고려인의 묘'가?
해프닝으로 시작된 사가현 여행
"저 사람, 왜 저러지?"
"전철 방향을 착각한 거지."
"뛴다고 탈 수 있을까?"
홈 의자에 앉아 있던 어르신들의 대화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후에 어떤 대화가 이어졌는지는 모른다. 맹렬히 달린 보람이 있었는가. 결론을 말하자면 없었다. 시간 절약한답시고 올라탄 엘리베이터는 날 엉뚱한 곳으로 데려갔다. 택시 타는 곳으로 달렸다. 다행히도 딱 한 대가 대기 중. "옆 동네 공항버스 타는 곳까지 가주세요."
일찍 움직이기는 했으나 반대 노선 홈에서 기다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전철이 홈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나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전에도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버스 의자에 앉아 출발 시간을 기다렸다. 문을 닫고 막 출발하려는데, 한 청년이 캐리어를 끌고 달려온다. 운전사가 문을 열며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마음이 따스해졌다. 쓸데없이 택시비를 날리게 된 나의 실수를, 남의 선행으로 퉁쳤다.
2024 SAGA INTERNATIONAL BALLOON FIESTA
아침 7시 5분 하네다 출발, 9시쯤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사가현(佐賀県) 사가 역까지는 버스로 이동. 이번 여행의 목적은 '열기구 페스타'를 보는 것이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일제히 떠오르는 열기구 사진에 반해 몇 년 전부터 기회가 오길 기다렸다. 이번 행사 기간에는 비가 올 확률이 높다고 해서 걱정이었는데 역시나 구름이 가득하다. 만에 하나를 위해서 2박 3일로 일정을 잡았으니 적어도 한 번은 볼 수 있겠거니 기대해 본다.
사가 역에 내리자마자 우선 행사장을 확인해 두기로 했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느긋하게 걸어가고 싶었지만, 언제 비가 올지 몰라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운전사의 말에 따르면 오늘 아침 7시 예정이었던 행사는 강한 바람 때문에 취소되었고, 3시부터 있는 행사도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면 취소될 수 있단다.
휴식 시간에 들어간 행사장은 음식점 코너 외에는 한산했다. 아니, 음식점 외에는 볼 게 없었다. 꼬치 요리와 하이볼 한 잔을 샀다. 행사장 쪽 하늘이 보이는 곳에 앉아 오늘 첫 끼니를 먹었다. 한참을 쉬었는데도 12시도 되지 않았다. 열기구를 띄워 올리는 행사장으로 향했다.
산책 삼아 제방 위를 걸었다. 나지막한 산들이 친근하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시간이어서인지 철로를 달리는 전철까지 반가웠다. 산책을 마치고 행사장 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1시 반이다. 3시까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비도 오지 말고 센 바람도 불지 말아라.
사가현의 라디오에서 생방송을 하는지, 큰 변화가 없는 행사장에서 그나마 나타나는 소소한 변화를 언급하며 조금이나마 분위기를 띄우려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거기 자전거 타신 분, 행사장 안에서는 자전거를 탈 수 없습니다. 내려서 끌고 가 주세요"라고 주의한다. 자전거를 탄 사람은 라디오 방송에서 자기를 언급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미심쩍은 마음에 '혹시 나?' 하는 몸짓을 보인다. "네, 맞습니다. 거기 남자분. 죄송하지만 내려 주세요"라는 식이다.
안내 방송에 따르면, 오후 행사는 3시부터다. 열기구는 풍향에 따라 행사장에서 날려 보낼 수도 있고 다른 곳에서 행사장 쪽으로 날아올 수도 있다. 과연 날려 보낼 것인가, 날아올 것인가. 내일과 모레는 폭우로 강물이 넘쳐날 수도 있어서 모든 행사가 취소되었단다. 그렇다면 오늘 3시 행사가 유일한 기회이다. 제발 강풍이 불지 않기를!
보이지 않는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는 열기구
오디오북을 들으며 기다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행사장을 둘러보니, 어느새 관객으로 가득 메워졌다. 행사장에 움직임이 보였다. 뭔가를 측정하는 사람, 무엇인가를 가져다 놓는 사람. 기대가 부풀어 간다. 그래도 3시까지는 알 수 없단다. 마지막까지 바람 부는 상황을 보고 판단할 것이란다.
부풀려진 열기구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띄울 수 있을까이다. 오후 3시. 행사를 진행하기로 했다는 안내 방송에 환성이 터진다. 행사장 밖으로 날려 보내는 것과 밖에서 행사장으로 날아오는 두 개의 대회를 동시에 진행할 것이란다. 2024년 행사 기간 중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기회다. 열기구가 올라갈 때마다 참가자가 소개된다. 한국에서 온 참가자도 있었다. 준비된 열기구를 다 띄웠을 즈음, 저 먼 하늘에서 날아오는 열기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제히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니어서 내가 상상했던 풍경과는 달랐지만 충분했다. 언젠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날아오르는 열기구들의 군무를 볼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다시 사가현에 올 이유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어느 정도 보고 나서 컴컴해지기 전에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처음 온 길이었고 홀로 돌아다니는 여행인지라, 안전을 우선했다.
비 오는 날의 가라쓰 성(唐津城)
날씨는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운이 없는 여행으로 만들 수는 없다. 플랜 B가 활약할 차례다. 목적지는 '가라쓰 성'과 '이마리' '아리타'다. 아침 일찍 가라쓰 성으로 출발하여 이마리와 아리타를 둘러보고 사가 역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7시 51분에 출발하는 전철에 올라탔다. 오디오북으로 <가족의 변명(家族の言い訳)>을 듣기 시작했다. '가장 변명이 필요한 것은 가족입니다.' 시작부터 가슴을 찔러온다.
굳이 설명하기 싫어서 입을 닫기 시작한 지 오래다. 문득 형제들과 놀았던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섯 형제 중 장녀 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놀았던' 느낌이 남아 있지 않다. 돌봄과 장녀로서의 책임감이란 느낌만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장녀를 그만둔 지 오래다(물론 내 마음속에서).
덜컹거리는 열차의 엔진 소리가 시끄러웠고 흔들림이 심해 오디오북을 껐다. 일기예보를 증명이라도 하듯 하늘은 온통 비구름이다. 전철을 가득 메웠던 학생들이 빠져나가자 열차 안 승객은 드문드문이다. 어느 곳에나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고, 나의 여행지에 다른 사람들의 일상이 존재한다. 8시 반쯤부터 빗발이 차창을 적시기 시작했다. 일기예보 적중.
가라쓰 성의 첫인상은 계단을 올라간 곳에 멋들어진 등나무 그늘이 있다는 것이다. 등나무 꽃이 피는 계절에 오면 좋겠다 싶었다. 천수각에 올라 바라본 성 주변은 바다가 있어서인지 숨통이 트이는 경치였다. 성 주변을 산책하고 싶었으나 빗발이 세져서 포기하고 이마리(伊万里)로 향했다.
신비의 도자기 마을 이마리(伊万里)에 '고려인의 묘'가?
이마리역에서 택시로 이마리 도자기를 볼 수 있다는 오카와치야마(大川内山)로 향했다. 우선 점심을 해결한 후, 어떤 코스로 걸을까 관광 안내 지도를 펼쳐서 보고 있자니 지도 왼쪽 아래쪽에 눈에 확 띄는 표시가 있었다.
'고려인의 묘(高麗人の墓)'.
‘고려인’?
‘가야지!’
한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저 비석이 세워져 있을 뿐이라며, 걸어서 15분 정도면 갈 수 있을 거란다.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 그저 가고 싶을 뿐이다.
15분이면 도착한다는데 한참을 걸어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보자며 올라갔다. 점점 산 위로 올라가는 기분이다. 아니다 싶어서 오던 길로 방향을 돌렸다. 관광 안내 지도가 비에 젖어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분명 내가 걸어온 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올라올 때는 보이지 않았지만 내려갈 때는 보일 것이야. 보여주실 거야! 마음을 다잡고 걷기 시작했다.
역시나 내려오다 보니 오른쪽에 '고려 다리(高麗橋)'라는 표시가 보였다. 분명 이 다리를 건너가면 있을 것이다. 올라갈 때는 오른쪽에 있는 인공 폭포에 눈이 팔려 보지 못했다. 다리를 건너 5분 정도 올라가니 '고려인의 묘(高麗人の墓)'라고 쓰인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웠다. 이곳이었구나.
도자기 가게 주인이 알려준 대로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비석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인상 깊게 다가왔다. 드디어 고려인의 묘 앞이다. 두 손을 모았다. 이 마을에 온 의미가 생긴 순간이었다. 여행을 계획할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백제에서 도공들이 끌려왔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고려인도 있었다는 것은 처음 인식했다.
아기자기한 도자기 마을 오카와치야마(大川内山), 기념으로 일본 술 술잔을 하나 샀다. 가게 주인에게, 날씨가 좋았으면 느긋이 걸어 다니며 마을 안을 산책하고 싶었다고 말을 하니, 화창한 날에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볼만하다며 다시 오란다. 다시 오고 싶은 이유가 마음속 서랍에 저장되었다.
비 오는 날, 비에 젖은 지도를 움켜쥐고 걷고 걸었던 도자기 마을에서의 시간, 나에게는 소중한 기억의 한편이 되었다. 사가현은 볼 게 없다고 단체 여행 상품에서도 보기 힘든 곳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볼 게 왜 없어. 나는 다시 오고 싶어졌다. 여유롭게 머물고 싶었다. 어쩌면 이 느낌이 이번 여행에서 얻은 최대의 수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