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섭 더봄]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 문학관을 찾아서
[박종섭의 은퇴와 마주 서기]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가을 속으로 31세 요절한 명동의 신사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세월이 가도 살아있는 문학 세계
산과 들이 단풍으로 물든 11월, 문학저널 주관 문학 행사로 박인환 문학관을 찾았다. 박인환 시인은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로 잘 알려져 있다. 나도 좋아하는 시여서 언젠가 한 번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기념관을 찾고 싶었다. 한때 젊은이라면 박인환 시의 ‘목마와 숙녀’의 시 한 구절쯤은 읊을 줄 알아야 했다고 한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생략)”
왠지 쓸쓸함이 묻어나는 이 시 한 자락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젊은이들 마음에 깊은 위로를 해주었지 않았을까 싶다. 마주한 현실은 탁 풀리지 않고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방황하는 젊은이들, 그들은 이 시를 읊으며 술 한잔 들고 싶었을 것이다. 젊기에 꿈도 많고 욕심도 많은데, 현실은 따라주지 않고 답답할 때 아파하는 것도 젊은이의 특권 같은 것이다.
이른 아침 압구정 공용 주차장에 모여 새벽같이 서둘러 온 문인들을 태우고 버스는 강원도 인제를 향하여 출발했다. 넉넉히 3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다. 가는 중간에 가평휴게소를 들르니 단풍놀이를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산은 온통 단풍으로 물들고 있었다. 주최 측에서 준비한 따뜻한 떡과 과자 등을 먹고 나니 아침이 가볍게 해결되었다. 강원도 인제는 군복무를 마친 남자들에겐 추억이 있는 곳이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말이 있는데 전방으로 끌려간다는 마음을 인제와 원통의 지명을 들어 표현한 것이다.
박인환 문학관에 도착하니 회색 문학관 건물이 육중하게 서 있고 잔디 깔린 정원에는 박인환 동상과 몇 개의 조각품이 설치되어 있었다. 건물 벽에 ‘인제 사람 박인환(1926~1956)’이란 글씨와 함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박인환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1956년 3월 20일 31세의 이른 나이에 타계했다. 한국전쟁의 중심에서 전쟁이 끝난 후의 폐허처럼 그에게도 내면의 상흔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시 속에는 그런 아픔과 그리움이 묻어있다. 그럼에도 그는 인생의 공허함과 허무함에 빠져 방황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바로 딛고 일어나 삶의 희망을 찾고자 노력했다.
문학관으로 들어가니 시인이 살았던 시대의 행적을 볼 수 있는 거리에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리서사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3년 동안 청년 박인환이 운영하던 서점으로 여러 문인과 교류하던 장소였다. 서점은 그가 문단에 데뷔하기 위한 방편이자 정신적 의지처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이 일어난 발상지기도 했다.
당시 김수영 시인의 모친이 운영하던 ‘유명옥’이라는 빈대떡집은 시인 김수영, 박인환, 김경린, 김병욱, 임호권, 양병식 등이 드나들며 교류하던 곳이었다. 후에 동인지 <신시론> 제1집 발간의 밑거름이 되었던 곳이다.
봉선화 다방은 명동 부근에 있던 고전음악 전문 다방이었다. 문인들이나 예술인들이 드나들며 교류하고 시 낭송의 밤과 출판 기념회를 열었으며 전시회와 시화전이 열렸다. 해외로 나가는 예술인들의 환송 모임과 귀국 보고회 등이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던 곳이다. 모나리자 다방이 명동에서 문을 열어 문인들이 출입하고 후에 동방 살롱이 최신식 건물로 문을 열면서 종합문화회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위스키 시음장으로 문을 연 포엠은 값싼 안주와 술값으로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곳이다. 은성이란 대폿집은 탤런트 최불암 씨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명동의 대표적 술집이었다. 이곳은 문화예술인들이 문학과 예술을 꽃피웠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박인환이 죽기 얼마 전 ‘세월이 가면’이라는 작품을 이곳에서 남겼다고 한다.
시인의 거리처럼 조그맣게 만들어진 모형은 당시 박인환 시인은 물론 많은 문인들이 드나들던 만남의 장소였다. 그 속에서 시를 논하고 삶을 이야기하며 많은 시간을 공유했던 곳이다.
특히 박인환 시인은 명동 최고 멋쟁이 백작이었다. 가난하지만 어디서 구했는지 늘 입고 다니던 의복은 멋졌고 단정했다 한다. 상고머리에 넥타이, 커피색 양말, 검은 구두, 검정 박쥐우산을 들고 나타나는 박인환은 늘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패션모델로도 손색이 없었다 한다. 게다가 계절마다 맞는 옷을 입고 마시는 양주의 종류도 계절마다 달랐을 정도로 멋쟁이였다.
이런 멋쟁이 시인이 죽기 사흘 전 그가 좋아하던 <날개>의 작가이자 시인인 이상의 추모 밤을 개최하고, 자신은 자택에서 오후 9시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젊은 나이인 31세에 요절한 박인환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좀 더 살았다면 얼마나 많은 좋은 시를 남겼을까 싶다. 그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지만, 우리는 박인환의 생애를 기억하며 아쉬워한다. 그의 걸작 ‘세월이 가면’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박인환은 우리의 곁을 떠난 지 오래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한다. 우리들 마음에 따뜻한 가슴으로 남아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