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기 더봄]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 은퇴한 남자의 고민을 들여다보다 우리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누구인가 평범한 사람이 들려주는 진솔한 이야기 인생을 살며 한번 해볼 만한 멋진 일
직장에서 은퇴한 후 지난 날을 돌아보니 그동안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중 일부라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지역사회를 위하여 뭔가 할 일이 없을까 찾다가 어느 날 지역방송에서 방송 진행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방송 진행자라고? 평소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어 서류를 갖춰 지원했다.
방송국 대표와 인터뷰하는 날이다. 당시 대표는 KBS에서 오랫동안 뉴스를 진행했던 앵커였다. 그가 과거에 방송을 진행한 경험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답했다. 다만 대학 다닐 때 학비를 버느라 음악다방에서 DJ를 한 적은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때 음악다방 DJ가 꽤 인기가 있었지요"라며 빙긋이 웃었다. 그 경력이 인정되어 무사히 시험에 통과했다.
한동안 방송 진행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방송 진행자 대부분이 전직 방송인이었다. 첫 방송을 하는 날이다. 집에서 미리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꼬이고 실수가 잦았다. 이러다간 방송국에 피해만 주는 건 아닐까, 차라리 이제라도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랬더니 방송국 선배가 처음에는 다 그렇다며 차차 나아질 거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두 번째 방송도 실수 연발이었다. 그러나 차츰 횟수가 거듭될수록 조금씩 나아졌다. 내가 담당했던 프로그램은 지역 인사를 초청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송이다. 중앙방송에서는 아나운서, 작가, PD, 그리고 엔지니어가 각각 있는데 지역방송에서는 진행자가 이 모든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만큼 준비해야 할 일이 많다.
하루는 나처럼 지역민을 초청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송이 미국에 있다는 걸 알았다. 반가웠다. 스토리코어스(StoryCorps)라는 프로그램인데 2003년 10월 23일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당시 91세였던 세계적인 구술 전문가 스터즈 터겔이 첫 테이프를 끊었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오늘 이 순간부터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삶을 세상에 알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랜드 센트럴역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누가 여기 철근을 박았습니까? 누가 벽돌을 쌓았지요? 바닥을 닦은 것은 누구입니까? 오랫동안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이 땅의 사람들,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 부스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말할 수도 있고, 아이가 삼촌에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끼리 얘기를 나눌 수도 있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인임을!'"
그의 말대로 사실 우리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정치가나 부자 같은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남들이 보지 않는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이웃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스토리코어스를 처음 시작한 작가 데이브 아이세이는 젊은 시절, 노숙자들이 단돈 5달러를 내고 하룻밤을 보내던 뉴욕의 여인숙에 대한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다. 그는 이 다큐멘터리를 사진과 함께 책으로 만들어 노숙자들에게 보여주었다. 그중 한 사람이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나는 살아 있어! 나는 살아 있다고!"라고 소리치는 모습에 적지 않게 감동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행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놀랄 만큼 풍부하고 다양한 삶의 감동을 전해준다.
9.11 테러 때 세계무역센터 건물에서 빠져나온 한 남자의 이야기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야기인즉슨 테러 현장에서 한 사내가 건물을 빠져나가다가 동료의 구조요청을 듣고 다시 사지로 돌아간다. 그를 보고 옆 사람이 대체 뭘 하려는 거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는 친구를 구하러 가야 해요."
참된 역사는 방송의 헤드 라인을 장식하는 인물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채 살다가 죽을지언정 자신의 꿈을 유산으로 남겨놓는 보통 사람들한테 있다. 내가 진행했던 지역방송도 그랬다. 중앙방송처럼 유명한 사람이 출연한 건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진솔한 이야기는 이웃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번은 방송을 마치고 일주일 정도 지나 내게 전화 연락을 한 사람이 있다. 지난번에 인터뷰한 사람이 자신의 중학교 동창인데 헤어진 지 거의 30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와 만나고 싶다는 얘기였다. 나와 대담을 나눈 손님에게 연락하니 그도 그렇다고 하며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했다. 두 사람이 만난 건 물론이다.
방송한 지 2년여가 지나 프로그램 개편이 있었다. 이번에는 '문화산책'이란 프로그램을 맡아 1주일에 한 번씩 책을 소개하는 일을 진행했다. 나는 주말마다 평균 서너 권의 책을 빌려보는데 그중에서 방송에 적합한 양서를 하나 골라 1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어주었다.
이렇게 한동안 책을 읽어주는 남자가 되어 방송을 진행하다가 지인의 소개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도서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이 더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방송일은 접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일을 생각난다. 방송을 진행한다는 건 인생을 살며 한번 해볼 만한 멋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