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이 불러들인 '문 앞의 야만인들'···경영진과 주주 충돌 1980년대 미국 연상
블랙 먼데이 타고 나온 KKR 연상되는 MBK 野 상법 개정 이해충돌 코리아 디스카운트↑ 미국은 레이건 때 포이즌 필로 상황 정리돼
영풍과 고려아연 간 분쟁이 '10년간의 경영진과 주주의 대립'이라 묘사되는 미국의 1980년대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이사의 충실 의무에 주주를 포함하는 상법 개정이 이해 충돌로 인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즉 '한국판 블랙 먼데이'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20일 정·재계에 따르면 SK·두산 등 주요 그룹사가 추진한 사업 구조 개편이 일반 주주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불공정 논란을 낳고 있는 와중에 국회에서 민주당은 상법 382조의3(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 보호를 위한 노력'이란 선언적 문구를 포함하는 개정안을 당론으로 추진하고 있다.
주주(shareholder) 이익을 앞세워 고려아연 경영권 인수에 뛰어든 MBK파트너스와 영풍의 행동주의와 맥을 함께 하는 상법 개정 시도다. 지난 15일 민주당 주식시장 활성화 태스크포스(TF) 2차 토론회(좌장 오기형 의원) 발표자로 나선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MBK가 이사회를 장악한다면 사모펀드의 인수 목적 공개매수가 성공한 최초의 사건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1980년대 미국 자본시장은 경영진과 주주 간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다. 당시 미국 이사회는 경영진의 편을 들어 주주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는 사례가 빈번했다. 특히 1970년대 원유 가격 상승으로 큰 수익을 거뒀던 석유 재벌들이 이익을 주주에 돌려주기보다는 부진한 사업부를 유지하거나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대기업 집단(Conglomerate)의 확장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고 자본시장의 실망을 불렀다. 이에 반발한 기관투자자 주도의 적대적 M&A는 대기업 집단의 비핵심 사업을 매각하고 핵심 사업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전미경제학회가 발간하는 이코노믹 퍼스펙티브에 홀름스트롬(Holmstrom)과 카플란(Kaplan)이 2001년 기고한 논문에 따르면 1980년대 미국 주요 기업 중 약 50%가 적대적 M&A 시도를 경험했고 주식 공개매수의 약 20~40%가 기존 경영진과의 적대적 경쟁에서 비롯됐다. 1980년부터 1996년 사이 대형 기관투자자의 소유 지분은 30%에서 50% 이상으로 증가했다.
또 이 기간에 미국 주식시장에선 칼 아이칸 등 기관투자자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며 행동주의가 득세했다. <문 앞의 야만인들>이란 전직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브라이언 버로와 존 헤일러가 쓴 베스트셀러가 오늘의 한국처럼 갈 길을 잃은 월가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1987년 10월 19일 블랙 먼데이 공포 속에서 1988년 말 콜버그크라비스로버츠(KKR)가 뛰어든 지나친 공개매수 경쟁이 승자의 저주로 이어져 식품업체 'RJR 내비스코'가 한순간에 몰락하는 과정을 다뤘다.
이창민 교수는 여성경제신문에 "재벌의 사업구조 재편은 향후에도 계속 이해 충돌을 불러 한국도 미국처럼 10년은 시장 불안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사후적 책임 추궁 수단인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다만 민주당식 상법 개정은 이해관계 충돌을 더욱 심화시켜 RJR 내비스코의 사례와 같은 자본시장 참사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더욱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과거 경제민주화 기조의 연장선으로 지배주주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방향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다행히 레이건 행정부 때 '포이즌필(Poison Pill)'이 등장해 탐욕으로 일그러진 자본시장의 분규(紛糾)를 종식시킬 수 있었다. 1982년 변호사인 마틴 립튼(Martin Lipton)에 의해 고안된 포이즌필 전략은 적대적 인수자의 지분 확보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 주식의 희석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국내에선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 2020년 9월 '차등의결권'과 함께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필)'을 도입하는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민주당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마틴 립튼이 1979년 쓴 논문 '목표 기업 주식의 공개매입(Takeover Bids in the Target's Boardroom)'도 혁명적 아이디어였다. 기업 경영진과 투자자는 '주주'의 단기적 이익보다 노동자, 고객, 공동체 등 '이해관계자(stakeholder)'의 장기적 가치를 더 중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최윤범 회장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울산 지역 이해관계자들의 협조를 구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다만 포이즌필이 도입되기 전 논의된 전통적인 경영권 방어 전략은 한계가 있었다. 이른바 '백기사(White Knight)' 전략은 고려아연과 한화그룹과의 상호주 관계 해소 사례처럼 언제든지 동맹 관계가 와해될 수 있고 적대적 인수자보다 백기사에게 더 큰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유상증자 등을 통해 우호적인 유통주식 수를 늘리는 '그린메일(Greenmail)' 전략도 재정적으로 부담이 크고 주주 가치를 훼손한다는 비판이 따른다. '황금 낙하산(Golden Parachute)'은 경영진의 사익 추구라는 지적을 받는다.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 전략 역시 재무 상태를 악화시키고 MBK와의 지분 격차만 키운 자충수로 꼽힌다.
지난 13일 최윤범 회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꺼내든 '소수 주주 과반의결제(MoM, Majority of Minority)'도 박상인 서울대 행정학과 교수 등 상법 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제도다. 포이즌필 등장 이전의 이해관계자 이론의 연장선으로 소수 주주를 이해관계자로 규정해 복수의 신인 의무를 지도록 하자는 MoM은 글로벌 트렌드와도 동떨어진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MoM이 자본 유출을 부른 걸림돌로 판단한 영국의 금융행위감독청(FCA)은 지난 7월 29일 상장 제도를 개편하면서 이를 전면 폐지한 바 있다.
경영자의 신인 의무(fiduciary duty, 信認義務) 또는 신의 성실의 의무란 전통적으로 주주에게만 지는 의무로 통한다. 다만 한국이나 미국이나 회사법상 경영자는 주주가 아닌 법인의 대리인이기 때문에 주주 보호 의무가 명시되지 않는다. 자본거래든 손익거래든 회사에 이익이 되면 모든 주주에게 지분에 따른 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에 지배주주에만 유리하고 일반주주에 불리하게 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상법 382조의3에서 이사의 충실 의무로 번역된 신인 의무(fiduciary duty)는 충성할 의무(duty of loyalty)와 주의할 의무(duty of care)의 상위 개념이다. 그런데 지배주주의 이익 추구가 소액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사익 추구'에 불과하다는 발상으로 지난 2013년 채이배 전 민주당 의원이 경제개혁연대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처음으로 제기됐다.
민주당의 상법 개정안엔 "이사는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환경과 사회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이해관계자 이론이 담겼다. 하지만 학계에선 신인 의무를 설명할 때 '어느 누구도 두 명의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No man can serve two masters)'라는 성경 구절이 자주 인용되는 이유를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웅희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여성경제신문에 "경영자가 이해관계가 다른 여러 명에게 동시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결혼 맹세를 여러 명에게 하는 것과 같이 매우 비도덕적이라는 관점이란 비판을 받는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