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어쩌다 한 달, 이탈리아 (1)

[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때 이른 장마의 남프랑스를 포기하고 오랜 꿈이었던 이탈리아 자동차 일주 첫날, 아프도록 쓰디쓴 짠맛의 추억

2024-11-14     박재희 작가

처음부터 이탈리아 40일을 계획한 것은 아니다. 왕복 비행기 일정, 그에 따른 렌터카 예약만 확정 상태였고 사실 계획은 느슨했다. 자동차로 구석구석 다니며 돌아보기 좋은 계절에 '남프랑스 구석구석' 정도로만 목적지를 정해 놓은 터였다.

리옹에 도착하고 렌터카 사무실로 가는데 제법 세차게 비가 퍼붓는다. 이번 여행에는 주로 캠핑을 할 생각이지만 첫날부터 빗속에 텐트를 칠 수는 없었다. 리옹시 외곽에 미리 봐두었던 캠핑사이트를 포기하고 숙소 검색을 시작했다. 인천에서 도하, 도하에서 리옹까지 거의 20시간이나 걸려 도착했으니 운전 거리가 짧은 곳에서 찾기로 했다. 1시간 내외 운전으로 닿을 수 있는 곳, 나까지 총 세 명, 여자 둘, 남자 하나이니 방은 두 개 욕실은 하나라도 된다.

페이리외에서 계속 나타나던 무지개 /사진=박재희

숙소 예약 플랫폼이 얼마나 진화했는지 카테고리별 정렬로 자기에게 맞는 숙소를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발이 되어줄 차가 있으니 대중교통 접근성은 포기해도 된다. 청결도와 가성비를 중심으로 검색에 들어갔다.

숙소 검색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용객 리뷰를 살피는 노하우가 중요하다. 10점 만점에 평점 8점 이상이라고 해도 리뷰가 몇 개 되지 않는 곳은 거르는 것이 좋다. 최소 50개가 넘어야 지인이나 가족을 동원해서 짜고 치는 별점 마케팅을 피할 수 있다. 특히 최고점수가 아닌 최하점수를 준 사람들의 코멘트를 살펴볼 것을 권한다. 사소하거나 개인 취향인 것을 제외하고 일관된 불만 사항이 있는지 미리 확인한다면 사진만 멀쩡한 귀신의 집을 예약할 위험은 피할 수 있다. 주차가 가능하고 집주인이 인근에 거주하는 청결도 9.8의 숙소가 페이리외(Peyrieu)에 있었다.

일기예보는 점점 많은 비가 밤새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상청은 구라청’이라는 기대를 잠시 가져봤지만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는 굵어졌다. 캠핑을 포기하기 잘했다고 안도하며 숙소로 가는 길, 눈에 띄는 동네 가게로 들어갔다.

규모는 작았는데 제과점과 식료품점, 정육점을 겸하는 청과물 상회라고 불러야 하나? 세 시간 전에 구운 빵, 로스팅한 지 4일 된 커피 원두, 소 돼지 닭 양 각종 고기류와 야채, 과일까지 모두 파는 프랑스 시골 가게에서 우리는 마치 먹기 위해 프랑스에 온 사람들처럼 먹거리 쇼핑에 돌입했다.

"으아악 이거 짜. 너무 짜다. 대체 소금을 얼마나 뿌린 거야?”

미 선배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기를 씹다가 냅킨에 뱉더니 물을 들이켰다.

“소금 많이 안 뿌렸는데? 소금이 몰린 부분이 있나 보지.”

훈이 억울한 표정이다. 초행길 우중 운전을 도맡아 하고 피곤했을 텐데 저녁 준비를 도맡아준 훈이다. 고맙다는 소리는커녕 지청구를 들었으니 그럴 밖에. 김샌 표정으로 굽던 고기 한쪽을 입에 넣은 훈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우웩 이거 뭔가 이상해.”

영롱한 빛의 오겹살. 그때는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다. /사진=박재희

한눈에 선명한 오겹, 빛깔 좋은 생고기라고 집어 온 것은 세포 끝까지 깊이 절인 염장 고기였다. 베이컨을 만드는 재료였음을 뒤늦게 알았다. 시식조차 하지 않은 나만이 온전한 혓바닥을 보전했고 미 선배와 훈이는 저녁 내내 무엇으로도 가셔지지 않는 짠맛을 토로했다. 온몸에 전기충격을 가하는 듯했던 쓰고 짠맛. 소금을 뭉치고 농축한다고 해도 그 정도의 염도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두 사람은 바게트로 혓바닥을 훑어 닦는 듯이 빨아 먹었다. 납작 복숭아와 딸기를 우물거리며 사라지지 않는 짠맛에 몸서리를 쳤다. 바게트, 복숭아, 딸기 그러고도 결국 양치질에 돌입하는 순서로 쓰디쓴 짠맛 경감 프로세스를 통과한 후에도 두 사람의 혀는 맛을 느끼는 기능을 회복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맛을 느낄 수 있는 나만 혼자서 와인을 홀짝거렸다. 궁금했지만, 도대체 얼마나 짜길래 귓속까지 아픔이 느껴질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세상엔 모르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있으니까.

두 사람의 혓바닥 기능만큼이나 심각한 것은 일기예보다. 날씨 앱의 2주간 예보가 심상치 않다. 스크롤을 할 수 있는 화면 끝까지 선명한 우산 마크가 계속 이어졌다. 15일간 ‘많은 비’. 아무리 전 지구가 기상 이변을 겪는다지만 바삭바삭 빛이 라벤더 꽃잎을 타고 돌아다니리라 예상한 5월에 장마라니. 최소한 2주, 길게는 3주간 비가 계속될 거라는 남프랑스 여행을 강행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귓속까지 저리고 아프게 하던 짜고 쓴맛이 혓바닥 뿌리까지 후퇴했을 무렵 우리는 대략의 여행 동선을 그렸다. 이탈리아로 넘어간다. 나와 일행 모두 이탈리아를 여행한 경험이 있지만 모두 대도시 중심이었다. 서울과 부산만 본 사람이 한국을 봤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중 누구도 제대로 이탈리아를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반도의 서쪽 해안을 타고 내려가며 소도시들을 둘러보고 가능하면 시칠리아로 들어갔다가 구두 굽 지역 풀리아(Puglia)를 돌아 동쪽으로 올라오자고. 이탈리아를 구석구석 다녀보는 것으로 계획 수정을 마쳤다. 기억하지 못했지만 나의 오랜 꿈이었던 이탈리아 자동차 일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밤새도록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 소리처럼 지지직거리다 울부짖는 천둥 섞인 비가 쏟아졌다. 화들짝 아침 새소리에 눈을 떴다. 숙소를 찾아 우연히 오게 된 페이리외(Peyrieu)는 예상외로 멋진 동네였다.

프랑스 론 알프스 지역의 작은 마을이 그렇듯 자연과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동네라 아직 주민들에게 관광객이나 마을을 찾은 여행자가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는 소박한 마을이다. 자전거를 빌려 동네를 돌아보기도 좋고 트래킹코스로 이어지는 길도 있다. 머물며 가까운 론강 산책을 해도 좋다. 

축복과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이리스는 땅과 하늘을 오갈 때 무지개를 건너간다. /사진=박재희

잠시 비가 멈춘 사이 동네 구경을 마칠 때쯤 산봉우리와 마을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반원의 빛이 나타났다. 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여신 이리스(Iris)의 상징인 무지개였다. 무지개는 이리스가 새로운 모험과 시작을 축복하는 메시지를 전하러 하늘과 땅을 오갈 때 사용하는 길이라지 않던가.

···썸웨어 오버더 레인보우 somewhere over the rainbow··· 웨이 업 하이 Way up high···

아, 왜 이리 진부하냐고 하겠지만 어쩌겠나. 우리는 어느새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부르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무지개 너머,

아주 먼 곳에,

언젠가 들어본 그 땅이 있어요.

자장가에서, 꿈에서 들어본 곳으로 가요.'

가사를 끝까지 외지 못하는 우리는 뒷부분을 모두 허밍으로 불렀다. 음음음···.

“무지개 노래는 다들 이것밖에 모르더라. 끝까지 가사 아는 사람도 못 본 거 같아.”

여행 첫날, 출발의 축복을 알리는 상징을 마주하고 너무 설레는 마음이 무안해서 공연히 뭉툭한 소리를 했다. 그래도 깔깔깔 더할 수 없이 좋은 기분이다. 여행을 시작했다. 비록 비는 다시 퍼붓기 시작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