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심 더봄] 긴 터널을 빠져나온 아들의 선물 '하코네 온천 여행'

[양은심의 일본 열도 발도장 찍기](30) 가나가와현(神奈川県) 하코네(箱根) 온천 여행 결혼 30주년에 30여 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하코네 조각의 숲 미술관(箱根彫刻の森美術館)

2024-11-06     양은심 번역가(영상/책)·작가

자연이 풍부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활력을 얻기 위해 혼잡한 도시로, 건물에 둘러싸여 사람이 미어터지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에너지 충전을 위해 자연을, 일상에 지친 사람들은 숨을 고르려 낯선 곳을 찾는다. 이러한 행동들을 '여행'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익숙한 환경으로부터의 도피, 일상과 비일상을 오가며 삶의 균형을 조절한다.

하코네 조각의 숲 미술관에서 /사진=양은심

1박 2일 온천 여행. 이번 여행은 결혼 30주년을 맞은 우리 부부에게 큰아이가 선물한 것이다. 작년 11월에 취직하고 올여름에 첫 보너스를 받았다. 회사 대표가 첫 보너스는 부모님께 쓰는 거라고 조언했단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엎드려 절 받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괜찮은 곳에 가서 식사라도 하자는 걸 엄마네 결혼 30주년이니 온천에 보내 달라고 했다. 아들은 흔쾌히 “오케이!​“했다.

하코네 등산 철도를 타고 조각의 숲 미술관을 향했다. /사진=양은심

오래간만에 남편과 함께하는 나들이다. 각자 평소보다 살짝 부풀어 오른 가방을 메고 전철에 올랐다. 집에서 하코네(箱根) 고라 역(強羅駅)까지 전철을 세 번 갈아 타고 세 시간 정도 걸리는 여정이다. 보고 돌아다니는 게 목적이 아닌 나들이이기에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쫓기는 일 없고, 쫓아갈 대상도 없다. 그렇다 해도 아침형 인간인 우리 부부는 9시에는 집을 나섰다.

덜컹거리는 로컬 열차의 흔들림이 정겹고, 산등성이를 지그재그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하코네 등산 철도(箱根登山鉄道)'도 재미있었다. 출퇴근을 위한 이동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벌써 한가롭기만 하다. 온천 여관 외에 갈 곳은 딱 한 곳, 조각의 숲 미술관(彫刻の森美術館)뿐이다. 남편과의 추억의 장소다.

터널 같은 입구를 빠져나가면 조각의 숲 미술관이 나온다. /사진=양은심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나는 대학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올 때까지 미술관을 드나드는 생활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에야 제주도 하면 미술관이 떠오를 정도지만 30여 년 전만 해도 제주도에는 미술관이 없었지 싶다. 전시회 하면 '문화회관'에서 하는 아마추어 수상자들의 작품전이 내 기억의 전부다.

30여 년 전, 그때는 친구 지금은 내 파트너인 남편이 데려간 하코네 조각의 숲 미술관(箱根彫刻の森美術館)은, 미술관 하면 건물 안에 그림을 전시하는 곳이라고 이해하고 있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잔디밭 위에 커다란 조각품들을 전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건물 안 전시장도 있었겠지만 내 기억으로는 잔디밭에 놓여있는 조각품이 전부다. 그것도 구체적인 작품이 아닌 어렴풋한 이미지뿐이다.

터널 같은 입구를 빠져나간 곳에 있는 오카모토 타로의 작품 /사진=양은심

고라 역(強羅駅) 주변에 있는 온천 여관 체크인은 오후 3시부터였다. 그 전에 미술관에 들르기로 하고 한 정거장 전에 있는 '조각의 숲 역(彫刻の森駅)'에서 내렸다. 미술관에 입장한 후 왼쪽 건물 안에 있는 작품들을 본 후 잔디밭으로 나갔다.

조각보다는 그림을 더 좋아하는 나지만 푸르른 잔디밭 위에 자리한 커다란 조각품을 감상하는 맛은 각별했다. 추억의 장소에 남편과 함께, 그것도 아들이 보내준 나들이였으니 어찌 각별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0여 년 전에 봤던 작품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조각이 있었다는 것 외에는 까맣게 잊었으니 말이다. 

공에 비친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역시 우리 부부도 찰칵! /사진=양은심
노부부가 둘 사이에 놓고 사진을 찍으려던 작품 'Miss Black Power' /사진=양은심

느긋이 걸어 다니다 보니 조각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각도를 조정하고 있는 노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오지랖 넓은 나는 바로 행동에 들어간다. 손짓과 표정으로 '사진 찍어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영어로 하고 싶었으나 왜 입이 안 떨어지는지 하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남편 옆에 있던 부인이 내 몸짓의 뜻을 알아챈다. 만면에 미소를 짓고 찍어달란다. 어느 나라 사람이건 역시 아줌마들은 소통의 달인이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서너 장 찍어 주고 확인시켰더니 완벽하단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시라'고, 이번에는 영어로 말했다. 부인이 "You too"라며 손을 흔든다. 

하코네 사람과 말을 섞기도 전에 서양 관광객과 말을 나눴다. 우리 남편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소 지으며 기다린다. 쓸데없는 참견이라 책망하지도, 잘한다 부추기지도 않는다. 그저 미소를 지을 뿐. 그게 내 남편이다. 그래서 문화 다르고 말 다른 나라 사람끼리 부부라는 인연을 맺어 30년이란 세월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온천 여관 베란다에서 바라본 하코네 온천 마을의 하늘 /사진=양은심

똑같은 하늘이건만, 집 동네에서 올려다보는 하늘과 여행지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달라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우리 동네가 아닌 곳의 낯섦과 깔끔한 손님맞이 잠자리의 분위기가 편안하기까지 하다. 일상의 '일'자도 보이지 않는 공간. 어깨의 힘을 빼고 심호흡을 하며 "좋다"라고 읊조린다. 온몸이 세포 단위로 풀어지는 느낌에 떠나왔음을 재확인한다.

오롯이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전세탕 /사진=양은심
전세탕 입구. 손님이 있을 땐 불이 켜지고, 퇴실하면 불이 꺼진다. 사진을 찍었을 땐 만실이었다. /사진=양은심

이번 여행에서는 전세탕이라는 걸 체험해 보고 싶었는데 예약제가 아니어서인지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첫날은 대욕장으로 만족했다. 그 대신이라고나 할까, 체크아웃이 12시인 나는 아침 온천을 즐기기로 했다. 이른 아침 온천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섰다. 세 곳 중 한 곳이 비어 있다. 야호! 드디어 전세탕이다.

전세탕은 남의 눈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이 남달랐다.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을 흔들어놓고 지나간다. 아침을 여는 새들의 지저귐과 온천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오롯이 나 홀로 고요하게 보내는 30분이라는 시간. 이런 호강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래서 전세탕을 선호하는구나 싶었다. 50대를 넘어서면서 온천을 즐기게 되었다. 유카타도 걸리적거리는 듯하여 잠옷을 들고 다닐 정도였는데, 지금은 편하다.

고라 역 주변 모습. 중앙에 있는 건물이 역사다. /사진=양은심

부모로서 걱정스럽기만 했던 자식이 보내 준 여행지에서의 한가로운 시간. 베란다로 나가 하늘과 구름,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낮은 산을 보고 있자니 가슴 언저리를 간지럽히는 감정이 일었다. 솜사탕 같은 것이 가슴안에서 꿈틀댄다. 대학 생활 6년과 취준생 생활 2년을 거친 아이다. 덕분에 그 어미인 나는 인생 공부 참 많이 했다. 그 아이가 보내준 온천 여행. 감개무량하다.

전세탕으로 가는 길. 내가 좋아하는 경치다.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곳이다. /사진 =양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