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 더봄] 남도로 가을여행 떠났어요

[김현주의 텐션업 갱년기] 아이의 수학여행 일정에 맞춰 남편과 함께한 배낭여행 광주 찍고 목포행 3박4일

2024-11-05     김현주 공공기관인, 전 매거진 편집장
광주 양림동 골목 곳곳에 마련된 전시장을 찾은 후 구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245에 방문했다. /사진=김현주

늦은 휴가를 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의 방학이 시작되는 날짜에 맞춰 며칠이라도 다녀오곤 했는데, 아이가 수험생이 된 이후에는 가족 여행은 언감생심이다. 그래도 올해는 진작에 아이의 수학여행이 예정되어 있던 터라 그 시기에 맞춰 남편과 둘이 휴가를 다녀오기로 했다.

모처럼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던 건 물론이다. 게다가 아이가 좋아할 만한 곳으로 목적지를 정하는 게 아닌 오롯이 남편과 내가 관심 있고 즐거울 만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니, 오히려 더 설렜다. 3박4일 둘만의 여행이라니, 마치 연애 시절 시간 될 때마다 의기투합해 짐을 싸서 나서던 때가 떠올랐다. 

여행지는 광주와 목포로 정했다. 가능한 한 가볍게 마치 청년 여행자처럼 다녀보자고 마음먹은 우리는 운전을 하는 대신 기차를 타고, 트렁크를 끄는 대신 배낭을 메고, 호텔 대신 게스트 하우스에서 묶기로 했다. 체력이 되는 만큼 그러나 너무 무리가 되지 않게 걸어 다녀 보자는 게 이번 여행 계획이었다.

첫 행선지는 광주였고, 비엔날레가 끝나기 전에 첫 관람 때 가보지 못한 국가별 파빌리온을 돌아보기로 했다. 광주 시내 곳곳에 위치한 주요 문화 시설에 31개의 국가 혹은 기관이 전시장을 꾸려 놓았으니 그곳 중 몇 곳만 돌아봐도 광주 여행은 어지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전시장이 모여 있는 양림동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금남로를 잇는 동선은 광주의 근대문화와 청년문화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 곳 아닌가.  

양림동은 양림산 능선에 자리 잡은 광주천 건너 지역으로 20세기 초 서양인 선교사들이 모여 교회, 학교, 병원 등을 개설한 곳이다. 조선시대 광주의 부촌이었다는 이곳은 전통문화와 서양 문화가 결합된 근대역사 마을로 불리며 현재는 광주의 대표적 문화 역사 관광지로 꼽힌다.

아예 숙소를 양림산 기슭 호랑가시나무(이 지역의 대표 수목)가 심겨 있는 게스트 하우스로 정해 놓은 우리는 짐을 풀자마자 동네 골목길을 돌며 전시를 관람했다. 캐나다, 폴란드, 스페인 등 5개 국가의 파빌리온 전시는 물론 비엔날레 본전시도 이 지역 아홉 군데에서 열리고 있어 전시장을 도는 것만으로 자연스레 ‘시간을 거슬러 예술과 문화로 승화된 마을’ 양림동을 경험할 수 있었다.

다음날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전시를 보았고, 전시장에서 만난 분이 추천한 아르헨티나 파빌리온으로 향했다. 전시가 열리고 있는 5.18민주화기록관과 전남구도청 광장 앞 전일빌딩245도 방문해 봐야겠다는 심산으로 말이다.

광주민주항쟁 당시 건물에 퍼부어진 245개의 포탄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전일빌딩에는 마침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한강! 고맙다! 기쁘다! 5월, 이제는 세계 정신!’, 간결하지만 뜨거운 축하. 광주 한 복판에 와 있구나란 생각을 단번에 들게 만들어 준 그 현수막이 반가웠다. 

목포 원도심에 위치한 국가 문화유산 경동성당과 북교동 예술인 골목 김우진 작가를 기리는 작은 도서관 앞. /사진=김현주

아쉬운 마음으로 광주 일정을 뒤로 하고 목포행 기차를 탔다. 호남선의 종착역 목포,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어슴푸레 해가 떨어질 즈음 도착한 우리는 역에 내리자마자 낙지 덮밥으로 저녁을 먹은 후 근대역사문화거리에 예약해 둔 숙소로 걸었다. 목포항이 멀지 않아서인지 저녁 바닷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은 숙소 부근 원도심부터 돌기 시작했다. 과연 ‘지붕 없는 근대역사박물관’이란 칭호에 맞게 대한제국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의 생활을 짐작하게 하는 장소들이 곳곳에 위치했다.

목포는 1897년 자주적 개항을 한 이래 근대도시로 본격 성장했다. 이후 일제강점기 수탈을 위해 철도와 항만이 정비되고 목포는 당시 조선의 4대 도시로 불릴 정도였다고. 특히 유달산에서 근대역사관 1·2관 방향으로 펼쳐진 목포 원도심 일대는 그 당시 목포의 최고 번화가였다고 한다. 구 일본영사관을 사용하고 있는 목포근대역사관에서 만난 도슨트 선생은 이런 목포의 역사가 예향의 도시를 만들었다며 구성지게 노래 한 곡조를 불러주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내친김에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과 김시스터즈 전시관이 있는 북교동 예술인 골목으로 향했다. 우리나라 최초 신극 운동가 김우진, 수필가 김진섭, 여성 소설가 박화성, 극작가 차범석, 평론가 김현까지 그 마을에서 자란 예술인들의 자취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작은 동네에서 이처럼 많은 걸출한 문화예술인들을 배출했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후 이들의 일생과 작품을 담아놓은 목포문학관을 방문했는데, 문학을 전공한 남편은 그 어떤 곳보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구석구석 놓치지 않을 요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 오랜만에 진득하게 앉아 작품 속 문장들을 머릿속에 담아두며 되뇌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3박4일 여행을 마쳤다.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천천히 걸으며 설렘과 반가움, 기운을 얻은 시간이었다. 아이가 돌아오기 전 집에 도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서울에 올라왔고, 돌아오자마자 지친 몸을 누이며 ‘역시 집이 최고야’를 외쳤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제는 종종 이런 여행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볍게 떠나서 잔뜩 채워오는 여행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