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불태워 밸류업하라" 기업 실적 무관 K-디스카운트 시대 진풍경
장부상 주주환원 수치 높이면 해결? 미국과는 다른 한국 제도 일관성 無 고려아연 9.85% 미발행주식 딜레마
자기주식(자사주) 매입이나 소각으로 주식 가치를 높이려는 주주 제안이 몇년새 급증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상법상 자산으로 분류되는 자기주식을 불태워(소각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만회하자는 식이어서 기업 경영 부담은 갈수록 가중될 전망이다.
30일 한국ESG기준원에 따르면 자사주 매입과 소각 관련 주주 제안은 2020년 1건, 2021년 4건, 2022년 3건에 그쳤으나 지난해 14건, 올해 20건으로 증가했다. 지난 6월 금융위원회가 이른바 밸류업의 일환으로 자사주가 발행주식총수의 5%를 넘을 경우 보유 현황과 목적, 향후 처리 계획을 이사회에서 검토하고 의무적으로 공시하라는 지침을 내리면서 앞으로도 이러한 요구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지금까지 패턴을 종합하면 2020~2022년에는 대부분 개인주주나 소액주주연대가 자기주식 소각을 제안했으나 지난해부터는 국내외 기관투자자가 38%가량을 차지했다. 기관투자자들은 주주제안 외에도 공개 주주 서한, 의결권 대리 행사 권유 및 캠페인 등 다양한 활동을 병행한다. 자사주 소각 기업은 2021년 37개사였으나 2022년 78개사, 지난해 111개사로 늘었다. 특히 자사주 소각 결정 권한을 이사회 외에 주주에게도 부여하도록 정관을 변경하는 안건이 2년간 9건이나 상정된 바 있다.
다만 기업 실적과 관련성이 없는 장부상 수치만 바꾸는 행동주의는 뚜렷한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명예회장 조카인 박철완 전 금호석유화학 상무는 올해 초 행동주의펀드인 차파트너스자산운용에 권한을 위임하고 금호석유화학에 자사주 소각에 관한 정관을 변경하고 자사주를 100% 소각할 것을 제안했지만 주주총회에서 부결됐다.
금호석유화학 이외에도 DMS, DB하이텍, 삼목에스폼, 아난티, 오로라 등에서도 자사주 소각 권한을 주주에게 부여하자는 정관 개정안이 논의된다. 지난해 KT는 주주 제안을 수용해 이사회 안으로 상정해 자기주식 보고와 상호주 취득시 주주총회 승인 등 의무를 신설했다. 유안타인베스트먼트도 지난 3월 식품 재료 제조업체 에스앤디에 자사주 매입과 소각을 제안해 주주총회에서 통과시켰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주식 수가 줄어 주주들의 지분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이익을 환원해주는 효과가 있다. 동시에 자산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경영진도 자사주를 마다하지 않는 분위기만 미발행주식으로 간주해 매입 즉시 소각을 의무화하는 미국의 제도가 혼용되며 혼선이 일고 있다.
경제개혁연구소에 따르면 2011~2022년 자사주를 매각해 우호주주를 확보한 회사는 65개사에 이른다.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도 최윤범 회장의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따른 것이었지만 보유 목적을 미발행주식설에 입각한 주주환원 및 임직원 성과 보상으로 설정하며 9.85%만큼 분모가 작아지는 레버리지 효과로 MBK파트너스와 영풍의 지배력을 높이는 결과만을 낳았다.
국내에선 게다가 외국계 헤지펀드들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만회해달라며 자사주 소각을 요구하는 진풍경도 연출된다. 영국계 자산운용사 시티오브런던과 미국의 화이트박스어드바이저스, 한국의 안다자산운용 등은 올들어 삼성물산에 대해 자사주 매입과 소각을 요구하며 "주가가 2015년 제일모직과 합병 이후 코스피 대비 저조했고 시가총액은 순자산가치(NAV) 대비 60%가량 할인된 수준"이라고 짚었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등 일각에선 인적분할을 통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사주를 매개로 지배주주 지배력이 강화되는 '자사주 마법'을 근거로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모회사가 보유한 자회사 주식 의결권은 대주주가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회사 이사회가 결의에 따라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업이 보유한 모든 주식을 대주주 개인주식으로 간주하는 것이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최근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팰리서캐피탈이 SK하이닉스의 최대주주인 SK스퀘어 지분을 1% 이상 확보하고 주주 가치를 높이기 위한 자사주 소각 조치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산그룹 사업구조 재편의 핵심인 두산밥캣에 대해서도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을 비롯한 플랫폼 액트가 개입해 영향력 행사를 도모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부작용이 큰 주주 관여의 길이 제도적으로 열렸다는 점이다. 박동빈 한국ESG기준원 선임연구원은 "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지분율이 낮거나 경영권 분쟁 우려가 있으면서 자기주식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는 회사에 대해 주주 제안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자기주식의 보유 목적 및 구체적인 처분·활용 계획을 투명하게 공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