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마디 더봄] 치쿠린, 경비원 : 지키다

[윤마디의 유니폼] 앞에 서서 지키는 일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았다" "내가 당신 앞에 서 있다"

2024-10-25     윤마디 일러스트레이터

아라시야마 치쿠린

아라시야마(嵐山) 아라시는 바람, 야마는 산. 바람의 산.
일본 교토 서쪽에 있는 산 이름이자 관광지이다. 헤이안시대부터 (8~12세기) 봄이면 벚꽃, 가을이면 단풍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친구들과 아라시야마 역에 내려 15분쯤 걸어서 가쓰라(桂川) 강을 건너는 155m의 긴 나무다리 도게츠교(渡月橋 도월교. 달이 건너는 다리)에 왔다. 여기 도게츠교를 건너면 본격적인 관광지 거리가 시작되고 거리 중반쯤에서 치쿠린(竹林 죽림) 대나무숲으로 들어가게 된다.

치쿠린(竹林 죽림) /윤마디

나는 담양의 죽녹원 생각도 나고 11월에 울긋불긋해지는 산이 낯익은데, 이집트에서 온 친구들은 울창한 대나무 숲이 신기한지 연신 사진을 찍었다. 높다란 대나무 벽 사이 좁은 길에 깊숙이 들어서니 관광객이 많은데도 고요하게 느껴졌다. 아마 딱 붙어 다니게 돼서 말이 필요 없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치쿠린을 빠져나오자, 민가 마을이 나왔다. 큰 숲에 폭 안긴 마을답게 작고 낮은 집이 도로를 마주하여 골목 골목을 이룬다. 일본의 전원주택 마을에는 아직도 세모 모양으로 기와를 얹은 박공지붕이 많다. 지붕 있는 집 앞에는 우유 통이나 나무 명패가 걸린 대문이 이어지고, 집들 사이에 대나무 젓가락, 수첩, 향수처럼 작은 물건을 파는 기념품 상점과 유자차를 파는 카페, 창가 옆 평상에 방석을 깔아둔 좌식 음식점들이 있다.

그러다 확 넓은 길이 나왔는데 꼭짓점을 돌아가는 긴 담장 안에 2.5층 집이 보였다. 담장 앞에는 오래된 나무에 단풍이 만발해 있었다. 문화재나 관공서 아닐까 싶었는데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한 경비원이 나무처럼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윤마디

노년의 경비원을 보자 도쿄 황궁의 대문 앞을 지키던 경비원이 생각났다. 그도 역시 닫힌 대문 앞에 가만히 서서 지나는 이들을 응시했다. 무엇 앞에 서 있으면 곧 그것을 지키는 일이 된다. 누군가 지키고 있으면 뭔지는 몰라도 귀한 것 아닐까 싶어진다.

영화 <전란>에서, 왜군이 빠르게 북상한다는 소식에 선조는 백성들 몰래 궁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다. 한밤중에 궁궐 뒷문으로 빠져나와 산 중턱을 오르다 활활 타는 경복궁을 내려다보고는 궁이 왜 불타고 있냐며 황당해한다. 선조는 왜 몰랐을까? 왕이 궁을 버리면 궁이란 불에 타는 것이다.

담장에 딱 붙은 경비원은 지키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지킨다는 것은 귀하다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약하다는 것이다. 소중한 건 다치기 쉽다. 그래서 안과 밖, 딱 그 경계에 서서 누구도 이곳을 버리지 않았음을 세상에 알려줘야 한다.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았다. 내가 당신 앞에 서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손님을 끌어오는 일도, 풍파를 대신 맞아주는 일도 아니지만 내가 당신을 지키고 있다고 사람들이 알게 하는 일이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 당신에게서 나와 당신을 등지고 서 있다.”

도쿄 황궁의 으리으리한 대문 앞에서 황금색 견장과 붉은 술을 가슴에 달고 있던 경비원과 다르게 대나무숲 마을의 경비원은 빛바랜 남색 제복을 입고 담장 앞에서 두 발을 모으고 서 있다.

체구가 작은 일본 사람들의 키만 한 얕은 담장. 허리께까지는 회색 벽돌을 쌓고 그 위에는 회양목이 각을 맞춰 자란다. 맞은편 집 벽돌 화단에는 어린 대나무가 줄지어 심겨서 작은 바람이라도 불면 누렇게 뜬 이파리가 소소소 소리를 낸다. 대나무와 마주한 연로한 경비원의 몸은 대나무 마디를 닮았다. 대나무 쪽으로 기운 몸이 꼭 이 집을 업고 있는 것 같다.

일러스트레이션=윤마디

경비원의 연세와 비슷해서 그런가, 말라위 호숫가 마을 게스트 하우스인 쿨러닝의 사만다가 떠올랐다.

아프리카 남동부 내륙에 말라위라는 나라가 있다. 말라위 호수라는 큰 호수에서 이름을 따 온 나라다. 2017년 아프리카 종주 여행 때, 김성호 기자님의 <안녕 아프리카> 책에서 소개한 호수 풍광에 반해 그 글 하나로 말라위에 갔다.

셍가 베이(Senga bay)  호숫가 마을에서는 호수에 해가 뜨고 달이 뜨는 교대 시간에 맞춰 하루가 흘러간다. 동이 트면 마을 사람들이 호수로 나와 남자들은 통나무배에 그물을 싣고 물에 밀어 넣어 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아낙네들은 냄비를 들고 와 쌀을 씻는다. 낮에는 벌거벗은 아이들이 호수를 차지하고 놀다가 해 질 무렵에 아낙네가 아침에 밥했던 냄비를 가져 나와 헹구면 개가 따라다니며 떨어져나온 밥풀을 주워 먹는다. 해가 호수로 빠지면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모래밭에 모닥불을 피우고 개도 옆에 자리 잡고 불을 쬐다가 별이 하나둘 떠오를 때 사람도 개도 자기 집 울타리로 돌아간다.

그런 호숫가 마을의 작은 게스트 하우스 쿨 러닝. 호수의 시계와 다르게 쿨 러닝의 시계는 따로 흐른다. 숙소의 주요 고객인 유럽인의 관광에 맞춘 시계이다. 쿨러닝의 종업원들은 카라가 반듯하게 접힌 티셔츠를 입고 가슴에 붙인 쿨러닝의 심볼 스마일리처럼 미소를 장착하고 있다. 아침이 되면 호수에 낚시하러 가는 게 아니라 서양식 아침을 요리하고 낮에는 손님 침대보를 벗겨 빨아 볕에 말리고 정원을 가꾸는 일을 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쿨 러닝 마당에서는 주민 회의가 열린다.

쿨러닝의 호스트인 사만다는 중년의 유럽인으로 자신을 올드 히피라 부른다. 긴 백발을 틀어 올린 작은 체구의 그녀가 건장한 말라위 아저씨들을 진두지휘하고 자원봉사 온 젊은 유럽인들을 말라위 수도 릴롱궤까지 픽업트럭으로 수시로 실어 나른다.

사만다는 소녀 시절 가족과 방문한 셍가 베이를 잊지 못해 2003년에 돌아와 게스트 하우스를 열었다. 유럽에서는 사라지고 없는 - 마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모습을 지켜주고 싶었단다. 사업 수익 절반을 지역에 환원하고, NGO에 열심히 연을 대어 물적 인적 후원을 받아와 마을에 시설을 세우고 주민을 교육한다. 이른바 Cool project로 자율 방범대를 조직하고, 학교와 직업훈련소, 연구소와 의료시설을 세워서 말라위 사람들이 말라위에서 먹고 살 기술을 배워 자급자족이 가능하도록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국적 불문 관광객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내 집을 지키는 경비원, 그 길에서 수입을 가져와 내 집을 먹여 살리는 사만다에게서 가장의 모습을 본다.


가장은 경계에 서 있다. 지키려면 때로 등지고 나와야 한다. 나의 부모는 나를 먹여 살리느라 젊은 날을 아침부터 밤까지 양장점, 홈패션 가게로 나가 일하시다가, 작은 방이 지겨워 전국으로 도배하러 다니시다가, 늦게까지 어린 나를 데리고 있을 수 있는 세탁소를 인수해 다시 작은 가게로 들어와 하루 종일 다리미판 앞에 서 계셨다.

나는 늘 엄마가 언제 집에 들어오나 기다렸지만 그 시절 엄마가 있을 자리는 집과 일터 중간이었을 것 같다. 딱 발 붙이고 설 자리. 그 작은 자리에서 가정을 업어 키워내는 가장들이 오늘 아침에도 묵묵하게 출근하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