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정 더봄] 한국인 부부를 막아선 튀르키예 청소년들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사람 반가워하는 튀르키예인에 감동 코리아 인기에 감사하고 겸손해져야

2024-10-26     박헌정 작가

40년 전 경주 수학여행 때였다. 한 친구가 어느 서양인 부인과 사진 찍는 걸 보고 "나도, 나도!" 하며 이놈 저놈 달라붙어 서양인 한 명을 동양인 수십 명이 둘러싼 사진이 되었다. 선교사나 의료봉사자도 아니고, 인기 절정이던 피비 케이츠나 소피 마르소도 아니고, 그냥 노랑머리의 서양 아줌마였다. 그래도 우리는 신났고, 이런저런 영어도 해 보았다. 그 시절엔 외국인이 얼마나 신기했던가.

아내와 튀르키예 여행 중이다. 오늘은 이스탄불 동남쪽 이즈니크(Iznik)에 들렀다. 이 도시의 옛 이름은 니케아(Nicaea), 이곳에서는 예수의 '신성(神性)'과 삼위일체론을 공식화한 최초의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성상과 성화(聖畵)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결론 내린 7차 공의회(787년)가 열렸다.

현재는 평범한 이슬람 모스크가 되어 있는 7차 공의회 장소를 둘러본 후 근처의 로마 시대 원형극장에 갔다. 로마보다 규모는 작지만 후대의 것이라 형태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현장학습 나온 고등학생 중 한 명이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했다. 그때부터 아이들 시선은 설명하던 선생님으로부터 우리 부부에게로 옮겨졌다. 수업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관람하고 나오는데 결국 그들에게 붙잡혔다.

밖으로 나오려면 허리를 굽혀 동굴처럼 낮은 통로를 몇 개나 지나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앞에서 정체가 생겨 결국 어느 홀에서 아이들과 조우했다. 녀석들이 우리를 빙 둘러쌌다. 언제부턴가 나는 선거 출마자처럼 손이 보이는 대로 악수하고, 아내는 여학생들과 포옹하고 있었다. 이스탄불과 두 시간 거리인데도 외국인이 신기한 걸까? 곳곳에서 "안녕하세요"가 들리는 걸 보면 우리가 코리안이라 그런 것 같다. "곤니찌와?"했던 아이는 친구한테 한 소리 들었다.

이 학생들이 이 사진을 다시 볼지 모르지만 짧은 만남에서 코리아에 대한 좋은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다. /박헌정

한 아이에게 "같이 사진 찍을래?" 했더니 다들 몰려들어 이번에는 내가 40년 전 그 서양 아줌마 위치로 들어갔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덕분에 갑자기 한국을 알게 된 건 아닐 테고, 내가 BTS를 어느 한 부분이라도 닮은 젊은 오빠도 아니고, 자기 아빠보다 더 늙은 아저씨인데 이렇게 좋아해 주다니!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활짝 웃고 어깨 두드려주는 것뿐이다.

잘 가라고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아내가 안 보인다. 찍은 사진을 아이폰끼리 주고받고 있었다. 40년 전 그 서양인 아줌마한테는 누가 사진을 보내주었나 모르겠다.

외국에서 이런 일을 가끔 겪는다. 한번은 베트남 호이안을 살살 돌아다니다가 시끌시끌한 곳이 있어 가 봤더니 실내에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젊은 부인 열댓 명이 나를 보고 길길이 뛰며 소리 질러 깜짝 놀랐다. ‘오빠’ 소리도 들렸다. 아내는 유치원에서 엄마들과 아이들이 뛰어노는 시간이었다며, 엄마들끼리 BTS나 K-Pop 이야기할 때 짝퉁 같은 한류 얼굴이 쑥 다가와서 그런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러니 잘못하면 연예인이라도 된 듯이 착각하겠다. 이럴수록 국뽕 추태가 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가끔 자기가 코리아를 다 만들어놓은 양 선 넘는 사람들이 보여 조마조마하다. 나라 이미지 먹칠하지 않도록 말수는 줄이고 미소 연습이나 더 해야겠다.

부르사(Bursa)에 도착해 하루 잔 후 시내를 구경하고 다음 목적지인 내륙의 우샤크(Usak)로 출발했다. 최종 목적지는 반도 남부의 지중해 연안 안탈리아다. 렌터카의 시트가 내게 안 맞는지 허리가 불편하다. 중간에 좀 쉬어야겠는데, 도로변에 주유소나 마트는 있지만 그런 곳보다 동네에 들어가 조용한 찻집에서 차이(홍차)를 한잔 마시고 싶었다.

무턱대고 오른쪽으로 꺾어 어느 언덕 위 마을로 올라갔다. 맞은 편의 차, 트랙터, 걷는 사람 전부 우리를 뚫어져라 본다. 일반적인 여행자 동선을 벗어날 때마다 이런 주목을 받는데,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때론 거북스러운 경계심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곳 튀르키예에서 느끼는 외국인에 대한 호의와 배려의 시선은 지금껏 어느 나라보다 자상하고 따뜻했다. 운전할 때는 내 얼굴이 방향지시등보다 강력해서 사람들이 전부 양보해 준다. 

우연히 들른 마을에서 받은 따뜻한 환대는 이 나라 전체에 대한 이미지로 오래 남을 것 같다. /박헌정

10분쯤 올라가니 마을 중심부인 듯한 장소가 나왔다. 버스도 돌릴 수 있을 만한 넓은 공터와 가게와 그 주변에 의자와 테이블이 여럿 놓여 있다. 옛날에 우리 시골에선 이곳을 '차부'라고 했다. 모든 교통과 정보가 드나드는 주민들의 공간이다.

차에서 내리자 어떤 아이가 강아지처럼 반기며 뛰어왔다. 차를 마시겠다고 하니 우리를 잡아끌고 구멍가게로 갔다. 놀란 가게 주인은 홍차 티백을 꺼내주는데 말도 안 통하고 보디랭귀지에도 실패해서 40리라(1600원) 주고 일단 받아서 들었다.

그러다 우리가 차 마시는 카페를 찾는다는 걸 겨우 알아듣곤 미안해하며 가게 바로 옆의 영업을 하는 카페인지, 동네 사랑방인지 모를 곳으로 데려갔다. 이미 마을 노인 넷 정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인사 나누고, 번역 앱으로 필요한 대화를 하고, 차를 두 잔씩 얻어 마시고, 과자 대접을 받았다. 여기는 카라쿄이 마을이고 주로 보리, 밀, 콩 농사를 짓는단다. 우리 같은 사람이 찾아온 건 흔치 않은 일인 듯 이들 반응은 반갑고 신기해하는 한편으로 조심스럽고 예의 있고 극진했다. 소문 듣고 동네 사람 서너 명이 더 오고, 가게 주인은 통역으로 그의 여덟 살짜리 조카딸까지 데려와 합석했다.

노인인 줄 알았더니 띠동갑 동생이었던 가게 주인과 우리를 안내해 준 이스마일 /박헌정

TV 프로그램에선 이런 곳에 자주 들르고, "마침 오늘은 마을에 결혼식이 있는 날"처럼 믿기 애매한 멘트로 어떻게든 이야기를 끌고 나가지만, 이 순간 여기는 어떤 이야깃거리도 없을 것 같은, 너무나 평범하고 평화롭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만일 이렇게 조용한 일상마저 극화(劇化)한다면 그건 아마 남의 인생을 내 느낌으로 재해석한 새 창작품일 것이다.

차를 석 잔째 권할 때쯤 일어섰다. 차 대접은 이쪽 문화권의 기본이라 들어 돈을 내면 큰 결례일 것 같다. 그런데 갖고 있는 선물용품은 술뿐이라 술을 마시냐고 조심스레 물으니 깜짝 놀라며 자기들은 술과 담배는 전혀 하지 않는단다. 우리도 그렇다고 하니 훨씬 반가워한다.

튀르키예는 세속주의 이슬람을 선택했고 그 결과 음주에 매우 개방적이라고 들었는데 그건 대도시 이야기인 동시에 비이슬람권과의 교류를 위한 결단이었음이 이해되었다. 도시에서 술집이나 술 판매점은 보기 힘들고, 지방으로 다녀보니 엄격한 이슬람 규율에 따라 단정하게 사는 모습이 보인다.

마을 촌장인 듯한 분은 "안전하게 운전 잘해서 가라" 하고, 나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라"고 인사했다. 따라 나온 그 아이(이스마일)에겐 과자 두 봉지를 주었다. 얼굴 빨개져 안 받으려고 하는 녀석을 꼭 안아주니 그제야 받았다.

따뜻한 차 한 잔이 이렇게 먼 곳의 사람들을 심정적으로 연결해 주다니. 비싼 특산품 차도 아니다. 우리가 얼떨결에 산 것과 같은 티백 제품이다. 옛날에 우리도 마을에 누가 지나가면 "와서 좀 쉬다 가라" 또는 "아직 안 했으면 밥 한술 뜨고 가라"하며 권했다. 그러면 "그럴까요?" 하며 다가와 새참 막걸리나 식사를 나누곤 했다. 그런 기억이 살아나서 참 좋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렇게 외지고 궁벽한 두메산골이 아니었다. 그 마을 너머로도 많은 마을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이 귀한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요즘 저출산 대책처럼 사람이 귀해서 대접해 주는 게 아니라, 대접부터 해주면 사람은 소중하고 귀해진다. 그러면 저출산 대책 같은 건 필요도 없다. 튀르키예 다녀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람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순수하게 사람을 좋아해 주고 반가워해 주는 것만큼 고마운 게 또 있을까.

튀르키예 여행자들은 인구 1500만의 대도시 이스탄불에서 겪은 번잡함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튀르키예 사람들의 해맑고 따뜻한 성격에 대해서는 전부 공감한다. /박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