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웅익 더봄] 비극의 역사를 간직한 정동길의 건축물들

[손웅익의 건축 마실] 겉 다르고 속 다른 돈덕전 남아있는 설계 자료가 부족하다면 복원을 미루었어야

2024-10-20     손웅익 건축사·수필가
복원된 돈덕전 /그림=손웅익

시청 건너 세실극장에서 돈의문 터까지 건축 해설을 하던 중에 생긴 일이다. 덕수궁 서북 측 ‘고종의 길’에 이르렀을 때 수강생 중 한 분이 “이 길은 고종황제가 어디로 행차하신 길인가요?”라고 물었다. ‘아관파천’의 길이라서 ‘고종의 길’이라고 명명되었다고 알려 드렸더니 “명예로운 길인 줄 알았는데, 치욕의 길이었군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송강 길, 박수근 길, 겸재 길, 송해 길처럼 길 이름에 사람 이름을 붙인 경우는 기억할 만한 명사로서 당사자나 후손들에게는 명예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서울에는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던 길과 건축물이 많다. 그중에 정동 길에는 조선 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비극의 역사와 함께한 건축물이 유난히 많다. 정동 길은 강북삼성병원이 있는 정동사거리부터 덕수궁 서북 측 담장까지다.

러시아공사관의 일부 /그림=손웅익

정동 사거리에는 서울의 사대문 중 서대문에 해당하는 돈의문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된 후 지금껏 복원되지 못했다. 돈의문도 그렇지만 4소문 중 서소문인 소의문도 일제강점기 때 철거해 버려 이제 잊힌 문이 되었다. 서울의 사대문과 4소문 중에 서대문과 서소문만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정동 사거리에는 경향신문 사옥이 있다. 설계는 건축가 김수근, 시공은 현대건설이 했다. 사옥의 하부 눈높이 위치에서 콘크리트에 깊게 음각이 되어있는 공간사와 현대건설의 심볼 마크를 찾을 수 있다. 경향신문의 역사를 찾아보면 몇 차례나 강제 폐간이 되고 다시 살아나고 했던 비운의 기록이 있고 사옥은 그 역사의 현장이다.

정동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고색창연한 붉은벽돌 4층 건물이 보인다. 본체에서 튀어나온 현관과 계단 디자인이 아주 고풍스러운 건물이다. 과거 신아일보 사옥으로서 일제 강점기에 지어질 때는 미국의 싱거 미싱사였다고 한다. 그 이후 1965년 창간된 신아일보 사옥으로 사용되었는데, 1980년 신군부의 전국 언론기관 통폐합 때 경향신문에 흡수, 통합되는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다.

처음 지을 때는 지상 2층이었는데 해방 후에 두 개 층을 증축했다. 자세히 보면 증축 부위의 벽돌색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정동길에서 바로 출입할 수 있는 반지하는 신아기념관으로 사용되었는데, 얼마 전에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기념관은 레스토랑 안쪽에 아주 작은 공간으로 축소되었다. 레스토랑을 들어가서 그 안쪽 기념관을 자유로이 구경할 수 있다. 지상은 사무실로 임대하고 있고 1층으로 들어가면 로비에 싱거미싱을 전시하고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이 그 고색창연한 미싱 앞에서 어린 시절 추억을 회상한다.

신아기념관 현관 모습 /그림=손웅익

신아기념관을 지나 조금 내려가다가 국립정동극장 옆길로 들어가면 중명전이 있다. 골목 안쪽에 있어서 정동길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도 중명전의 존재를 잘 모른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장소로서 망국의 출발점이 되는 비극의 장소이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1905년 11월 17일은 유난히 날씨가 음산하고 추웠다고 한다. ‘을사년 늑약’은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일어난 민족적 비극이었던 것이다.

중명전은 우크라이나 출신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했다. 당시 왕실 건축가였다. 명성황후 시해 당일 경복궁 내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 근처에서 그 참혹한 현장을 지켜본 사람이다. 그가 그 현장을 그림과 글로 상세히 기록해 두었기에 일본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정동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덕수궁의 북측 담장을 따라가다 보면 담장 안쪽에 서양식 고전건축물이 보인다. 고종 즉위 40주년 칭경예식을 위해 지어진 돈덕전이다. 이 건물도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나 최근 코로나 시국에 복원 공사 하는 것을 내내 지켜보면서 기대를 가졌다.

최근에 완공되었다고 해서 찾아간 돈덕전은 큰 실망을 준다. 껍데기는 어느 정도 흉내를 낸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공간도 허접하고 무엇보다도 인테리어 자재들이 시대착오적이다. 계단 난간은 유리를 세웠고, 벽과 천장은 페인트를 칠했다. 바닥은 타일 문양, 나무판 문양의 저렴한 비닐 재질을 깔았다. 외부 형태는 고전적이고 내부 공간과 자재는 현대판이다. 남아있는 설계 자료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이렇게 허접하게 복원하느니 돈덕전 빈터에 당시 사진만 전시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이렇듯 정동길을 따라 건축 해설을 하다 보면 대체로 건축물에 얽힌 비극의 역사를 이야기하게 된다. 건축물도 그렇지만 중명전, 돈덕전, 정관헌 등을 설계했던 당시 왕실 건축가 사바틴은 방랑벽이 심했던 모양이다. 방치된 그의 가족들은 생활의 고통을 겪다가 러일전쟁 후 사바틴과 결별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동길을 걸으면서 좀 우울해진 수강생들에게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헤어진다’고 대답한다. 오늘처럼 돌담길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 ‘절대 헤어지지 않는다’는 농에 모두 한바탕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