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용산 불러낸 서울대병원···의·정 '새로운 균형점' 찾기 시작
장상윤 수석 초청해 2시간 의료개혁 논의 용산 틈만나면 2000명 타당성 설득 시도 집단행동이란 주장 대해선 극도의 경계심
전국 수련병원 전공의 집단 사직과 의대생 수업 거부에 따른 '의료대란'(醫療大亂) 국면이 8개월째 이어지는 가운데 대통령실과 의료계가 '새로운 균형점'을 찾기 위해 정부와 첫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10일 정치권에서 추진해 온 여야의정협의체 구성이 사실상 실패로 끝난 가운데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의료개혁 어디로 가는가' 제목의 토론회를 개최해 '적정 의사수' 및 '건강보험 재정 문제'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주제로 대통령실과 머리를 맞댔다.
강희경 서울대의대 비대위원장의 제안으로 성사된 이번 토론회는 국회에서 지난 7일 진행된 보건복지부 국정감사 이후로 엠바고를 걸고 일정을 잡자는 용산 대통령실의 요청으로 전일 개최 사실이 알려졌다.
당초 정부측에선 '2000명 증원 왜 필요한가'를 주제로 원했으나 이미 정부의 주장이 충분히 전달된 상황이어서 의료계측이 추가적인 논쟁은 회의적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다만 아젠다의 형평성을 위해 장상윤 사회수석비서관의 기조발제가 형식적으로 포함됐다.
장 수석은 "정부가 참고한 3개 전문가 연구에서도 미세한 가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2035년에 약 1만명의 의사가 부족하다는 동일한 결론였는데 이를 현실적 가정으로 보정한 결과는 2배(4000명) 이상 증원이 필요한 것으로 도출됐다"며 통계적 측면에선 정부 정책의 오류가 없었음을 강조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의약분업 당시 의료계와 타협을 통해 의대 정원을 351명 줄였던 사례도 꺼내들었다. 그는 "만약 당시 의대 정원이 줄어들지 않았다면, 의사 수는 2020년 기준 약 7000명으로 증가했을 것이며, 2035년 경에는 1만명 이상이 추가로 배출됐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의사수 수급 문제는 단순히 현장 의견에 의존해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란 점을 말하고 싶다"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은 정부의 책무"라고 주장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화 분위기는 조규홍 보건복지부장관이 지난달 30일 해당 직종 공급자단체에서 추천한 전문가가 7인으로 과반수가 되도록 하는 '적정 의료인력 수급 추계기구'를 설치하겠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본격화했다. 이날 정부측은 2000명 증원의 타당성을 강조한 반면 서울대 비대위측은 △지속 가능한 의료체계 구축방안 △의대 교육 정상화 방안 △환자 중심의 의료 체계 구축 방안 △의료 정책 결정 과정의 절차적 정당성에 중점을 두고 논의를 이어갔다.
2025년 증원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보단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한 숙의(熟議)의 자리였다. 토론에 앞서 쌍방간 비판적 언쟁의 빌미가 되는 발언은 하지 않겠다는 합의가 있었는데 장 수석이 의대 증원의 타당성을 기회가 날 때마다 설파해 특별 사회를 맡은 유미화 녹색소비자연대 상임대표가 제지하는 장면이 수차례 연출됐다.
"집단행동을 멈추고 정부와 함께 의료현장 혁신을 위해 지혜를 나눠달라"는 장 수석의 발언에 대해선 플로어에서도 격렬한 항의 목소리가 나왔다.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국내 의료의 미래에 희망을 보지 못하고 절망을 느껴 떠난 것을 집단행동 및 의사 악마화 도구로 봐선 안 된다는 요청에 장 수석도 고개를 떨구었다.
윤석열 대통령 의대 증원 정책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밀턴 프리드먼식 '양적완화'를 연상시키는 발언도 나와 눈길을 끌었다. 정경실 대통령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 의료개혁추진단장은 '의사 수가 늘어나면 의료비가 폭증할 것'이란 일각의 우려에 대해 "재정이 투입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며 "의료비와 의사수의 연관성은 없다는 연구가 대부분인 것으로 안다"고 강조했다.
'수요는 공급에 의해 창출된다'는 세이의 법칙처럼 의료 서비스의 공급은 결국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필수의료 부족을 해결하고 의료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는 원리다. 단기적인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 정책을 강조하는 케인즈주의와 달리 장기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해 인플레이션 목표 달성이나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방식이란 측면에서 의대증원은 통화주의 학파의 주장과 비슷하다.
이날 토론회는 한국의 의료의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방안을 의료 소비자에게 설명하는 방식을 원칙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꼬투리 잡거나 비방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뒀기 때문에 하이에크와 케이즈사이에 벌어진 사회주의 계산논쟁과 같은 치열한 설왕설래는 없었다. 서울대 비대위측도 의사수 추계 기구에 대한 비판적 의견 제시를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보건의료기본법 제3장 제15조에 따르면 보건복지부장관이 5년마다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지난 20년간 의료계와의 숙의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점을 서울대 비대위측이 지적했고 장 수석은 "앞으로 국민과 머리를 맞대어 만들겠다"고 답변했다. 강희경 위원장은 행사가 마무리된 뒤 "긴 안목을 가지고 의료 바로 세우기를 목표로 다같이 힘을 합쳐야 할 때"라며 "숙의를 위한 자리가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꾸준히 만들어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특이하게도 이번 토론회엔 2025년 증원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의료대란'를 정치 투쟁의 기회로 삼으려던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전공의협의회 소속 주요 인사들의 모습은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 가장 강경한 성향인 경기도의사회는 별도 성명문을 통해 "서울의대 비대위가 의료 농단 주범들과 야합하는 이적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최후의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